단단한 것은 대개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고, 손에 쉽게 닿지 않지만, 모든 것을 조용히 지탱하는 것들. 오래된 나무의 뿌리, 계절의 경계, 한 사람의 말없는 마음처럼요. 우리는 때때로 너무 많은 것들을 보려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지나쳐버립니다. 애써 찾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고 굳이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것들, 하지만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귀 기울여야 할 가치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버려진 나무의 뿌리로 만든 가구를 선보이는 업루티드(Uprooted)를 소개합니다.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호르헤 페나데스(Jorge Penadés)는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역의 올리브유 생산 방식에 대한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업루티드(Uprooted)’ 프로젝트를 탄생시켰습니다. 안달루시아는 세계 올리브유 생산량의 20~25%, 스페인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최대 산지인데요. 최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화된 초집약 농법을 도입해 생산 방식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년 된 토착 올리브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격자 형태로 조성된 단일 재배지로 대체되고, 굴곡지고 단단한 올리브 나무의 뿌리들은 기계 가공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대량 폐기되거나 킬로그램당 0.10유로에 장작으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페나데스는 이러한 현실을 목격하고, 업루티드 프로젝트를 통해 산업 표준에 맞지 않는 재료들이 지닌 내재적 가치를 재조명하여 지속가능성과 생태계 보존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내고자 했습니다.
페나데스는 스페인 말라가 출생의 디자이너입니다. 무엇보다 지역의 산업적인 생태계와 소재 자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안달루시아 지역의 가죽 산업에서 버려지는 가죽 소재를 활용한 스트럭처럴 스킨(Structural Skin) 프로젝트나, 다른 매장에서 사용하고 방치된 재료를 재활용한 캠퍼 매장의 디자인이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페나데스는 전 세계 캠퍼 매장의 인테리어를 디렉팅하는 일을 맡았을 때에 기존에 매장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과거에 캠퍼(Camper) 매장은 켄고 쿠마와 하이메 아욘과 같은 세계적인 스타가 디자인했으며, 신발로 가득찬 벽과 신발끈으로 만든 천장 등 화려한 인테리어를 선보이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매장을 오픈한 후 작동하지 않는 부분들을 고치는 데에 1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 페나데스는 기존의 방식 대신에, 운영과 기능을 우선시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페인 말라가에 있는 그의 첫 캠퍼 매장은 곳곳에 널린 금속 프로파일을 모서리 판과 너트, 볼트로 고정하여 제작했는데요. 결과적으로 페나데스의 팀은 캠퍼 공장에 있는 것만을 사용해 매장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를 직접 제작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작동하는 가게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존에 있던 것들을 활용하고 변형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을 뿐이죠. 제 목표는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소재와 디자인에 대한 그의 철학은 업루티드 프로젝트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업루티드의 핵심 재료는 산업 폐기물로 간주되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인데요. 올리브나무 뿌리는 자라는 방향이 제각각이고 내부에 작은 돌이 박혀 있는데다가, 목질이 지나치게 단단하고 건조 과정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휘어지는 등 일반 목재와 달리 가공이 어려운 점이 특징입니다. 페나데스는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 맞서기 위해 전통적인 디자인 방식을 전면 재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미리 정해둔 형태를 재료에 강요하기보다는, 재료와 대화하듯 반응을 관찰하며 디자인을 전개했습니다. 그가 ‘재료 인터뷰(Material Interivew)’라고 부르는 이 과정은 새로운 재료로서의 뿌리가 가진 한계와 가능성을 면밀히 탐구하여, 재료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이 결과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짓는 디자인 방법론입니다. 업루티드 프로젝트에서 페나데스와 함께 협업한 런던 소재의 소재 전문가 시탈 솔란키(Seetal Solanki)는 이러한 디자인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디자이너가 재료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되찾아야 합니다. 최소한의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료 중심의 디자인이 필요하거든요”
실제로 페나데스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와 일종의 인터뷰를 진행하듯 99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불에 그을리기, 절단, 물에 담가보기 등의 다양한 자극에 대한 재료의 반응을 실험했는데요. 이를 통해 탄생한 업루티드 프로젝트는 재료의 결함이 오히려 디자인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업루티드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가구 컬렉션은 2025년 2월에 스페인 마드리드 에스파시오 가비오타(Espacio Gaviota)에서 특별 설치 작품으로 공개되었습니다. 뿌리의 불완전함과 디자이너의 정교한 장인 정신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 인상적인데요. 선반, 테이블 디자인 , 의자, 그리고 벽등은 페나데스가 전시를 위해 직접 제작했습니다. 투박한 형태의 울퉁불퉁한 판자는 이 유물들에 수공예품 특유의 미감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우리가 환경을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업루티드는 지역의 재료와 사회문화적 맥락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방법론을 제안함과 동시에, 페나데스의 개인적 고향 이야기이자, 안달루시아 지역 공동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가장 개인적이면서 지역적인 프로젝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올리브 숲과 농경지는 안달루시아 지역 문화의 근간으로, 페나데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몸담아온 개인적 풍경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고향 풍경이 산업화로 변모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로 인한 지역 사회의 상실감을 디자인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요. 역사적으로 올리브 나무는 그 자체로 지중해 문화와 생태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로, 그 오래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지역 정체성의 뿌리입니다. 이처럼 재료 자체가 특정 장소의 역사와 맥락을 고스란히 명시하는 매개가 되고, 재료에 기반한 디자인 방법론 또한 지역 커뮤니티에 정체성에 대한 담론을 불러일으키는 열쇠가 됩니다. 실제로 전시에 사용된 사진과 자료들은 하엔, 코르도바, 그라나다 등 지역별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관람객에게 안달루시아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지역의 재료를 이해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산업의 이면을 드러내는 일. 그 당위성은 역설적으로 페냐데스가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지요. 그는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안달루시아를 관찰해왔고, 올리브 농업의 구조적 변화뿐 아니라 가죽 세공으로 대표되는 지역 산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발신해왔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프로젝트는 다시 스페인을 대표하는 로컬 브랜드 ‘캠퍼’의 매장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그의 디자인은 지역을 바라보는 방식이자, 그 지역의 이야기를 더 먼 세계와 연결하려는 언어인 셈인데요. 만약 그런 작은 움직임이 지역 산업의 감수성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변화의 시작이 아닐까요?
글
EVERY WEEK Edito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