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여는 철로

기차에 앉아 있다보면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것에서 느껴지는 묘한 여유의 감각이랄까요.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과 마을, 길게 늘어진 강줄기를 바라보다 보면 늘 붙잡고 있던 생각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풀리기도 하는데요. 상자 밖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주에는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헌터 뱅크(Hunter Bank) 소개합니다.

사냥을 떠나는 헌터 뱅크 ⓒHunter Bank

헌터 뱅크(Hunter Bank) 프로젝트는 일본 오다큐 전철 주식회사가 지역사회의 조수(鳥獣)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기획한 혁신적인 사냥꾼 매칭 서비스입니다. 일본에서는 멧돼지, 사슴, 원숭이 등의 야생동물이 농작물을 파괴하는 피해가 연간 158억 엔에 달하는데요. 전국 시정촌의 약 90%에서 조수 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잡아낼 지역의 헌터(수렵인)들은 고령화로 빠르게 감소하여, 머지않아 수렵 인력 부족이 심각해질 전망입니다. 이에 오다큐 전철은 젊은 수렵 희망자들을 육성함으로써 향후 지역의 유해동물 피해를 줄일 방안을 모색했고, 그 해결책으로 헌터 뱅크가 탄생한 것인데요. 오다큐 전철에서 헌터 뱅크를 담당하는 아리타 카즈타카(有田一貴)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실 철도회사가 지역 과제 해결에 나서는 것은 지금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 한큐전철이 연선 개발을 위해 다카라즈카 가극을 만들었듯, 1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철도업의 문화입니다” 

헌터 뱅크 프로젝트는 사내 공모를 통해 제안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젊은 직원이 ‘사슴과 멧돼지가 증가해 산의 생태계가 황폐화된다’는 문제를 접한 것이 계기였고, 여기에 더해 오다큐 철도 노선 자체도 야생동물과 충돌해 열차 운행이 지연되는 일을 겪으면서 이 문제를 회사 차원에서도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요. 오다큐 전철은 이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신규 사업 아이디어로 채택하여 2020년 시범사업을 거친 후, 2022년 정식 사업화하였습니다. 요컨대 헌터 뱅크의 목적은, 사냥에 관심은 있지만 실행 기회가 없던 잠재적인 헌터(이른바 ‘페이퍼 헌터’)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그들을 유해동물 피해로 고심하는 농가와 연결하여, 지역의 조수 피해를 줄이고 생태계와 지역 농업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터 뱅크의 사업구조 ⓒHunter Bank

헌터 뱅크는 2020년 8월부터 2021년 9월까지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서 처음 실증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약 50명의 헌터가 참여하여 멧돼지 31마리를 포획, 시범적으로 성과를 입증했는데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22년 6월 일반인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시작해서, 현재 오다와라시를 비롯해 야마나시현 고스게촌, 도쿄도 하치오지시, 지바현 후쓰시, 사이타마현 요코제정, 교토부 아야베시 등 여러 지역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사업 초기에는 오다큐 전철이 오다와라시에서 직접 운영을 주도했으나, 2024년부터는 지역별 공동 운영 파트너를 모집하여 일본 전국으로 전개를 가속화하고 있는데요. 헌터 뱅크 프로젝트의 주요 참여 주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오다큐 전철 주식회사
    프로젝트 기획 및 운영 주체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여 사업을 총괄합니다. 사내에 디지털사업창조부를 중심으로 프로젝트팀이 구성되어 있으며, 유해동물 포획 전문가 등 야생동물 피해 대책 전문가들도 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지방자치단체
    오다와라시와는 사업 초기부터 공공·민간 협력(PPP) 형태로 협약을 맺어 협력하고 있고, 이후 다른 지자체들과도 연계하여 현지 농가 소개, 행정적 지원 등을 받고 있는데요. 오다와라시는 헌터 뱅크와 ‘조수 피해 대책 추진에 관한 협정’까지 체결하며 적극 협력하고 있습니다. 

  • 지역 농가 및 임업 종사자
    유해조수로 피해를 입는 농림업자들이 토지 제공 및 덫 설치 협조, 미끼 놓기 등으로 참여합니다. 헌터 뱅크는 이들과 수렵 참가자를 매칭하여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 헌터 (회원)
    수렵에 관심이 있거나 수렵면허를 가지고도 기회를 못 찾던 일반인 회원들이 핵심 참여자입니다. 이들은 헌터 뱅크에 회원을 등록한 뒤 주말 등에 프로그램에 참여해 실제 포획과 해체를 경험하는데요. 2023년 시점까지 누적 회원 수는 500명을 넘겼고, 10~40대의 젊은층 중심으로 회원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헌터 뱅크 프로그램의 참가자들 ⓒHunter Bank

헌터 뱅크에서 회원 헌터들과 피해 농가를 팀으로 매칭하면, 매칭된 팀은 포획 절차를 역할 분담하여 수행하게 됩니다. 헌터 뱅크의 헌터들은 주말에 현지에 내려가 덫 설치와 포획 작업을 하고, 평일에는 현지 농가가 덫 주변에 미끼를 놓거나 순찰하며 협력합니다. 덫에 짐승이 걸리면 주말에 현장에 달려가 최종 포획을 수행하고, 이후 전리품인 고기를 함께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인상적인 건 헌터 뱅크의 운영 방식입니다. 경험이 없는 초보자도 쉽고 안전하게 수렵에 입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데요. 먼저 참가 희망자는 월 8,000엔의 구독료를 내고 회원으로 가입해야 합니다. 회비에는 수렵에 필요한 대부분의 준비물(박스덫, 작살, 해체 도구 등)의 대여와 상해보험 가입, 그리고 전문가의 교육 서비스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초심자들이 비싼 장비 구매나 복잡한 준비 없이도 바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사냥에 대한 접근성을 낮춘 점이 특징인데요. 거기에 더해 ‘스마트 헌팅’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회원들이 스마트폰 앱을 통해 산에 가지 않고도 트레일캠(자동센서 카메라)로 덫 주변 상황을 확인하고, 온라인으로 농가와 헌터가 소통하고, 일정을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는 헌터들도 굳이 매일 산에 가지 않고도 수렵활동을 지속할 수 있고, 농가 입장에서도 번거로운 작업 지시를 편리하고 정확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요. 생업이 걸려 있는 농가의 입장과 부업 내지는 취미 생활로서 헌터 뱅크에 참여하는 회원 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를 좁히는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생각됩니다. 

헌터 뱅크 프로그램의 참가자들 ⓒHunter Bank

얼핏 거대한 기업에서 하는 작은 사회 사업으로 보일 수도 있고, 사냥이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문화로서의 인식,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던가 동물권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수 있는 지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터 뱅크 프로젝트에서 주목할만한 건 ‘확장 가능한 관계’를 고안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굿 디자인 어워드(Good Design Award)는 2023년에 헌터 뱅크를 베스트 100에 선정하면서 ‘지속적으로 헌터를 육성·배출함으로써 조수 피해를 저감하려는 훌륭한 시스템 디자인’ 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무엇보다 지역의 농가와 사냥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을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주체는 반드시 오다큐 전철일 필요도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자체에서 직접 사업화할 수도 있고, 사냥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새로운 레저 활동을 원하는 젊은 층의 고객이 많이 이용하는 IT 플랫폼이 할 수도 있습니다. 각 지역마다 피해의 정도나 형태, 농가의 규모나 농작물의 종류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각지에 맞는 변형된 헌터 뱅크들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요. 더 나아가서는 ‘사냥’이 아니라 지역이 처한 다른 이슈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사냥이라는 수단이 아니라,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두 가지 별개의 문제를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하고, 서로의 필요를 몰랐던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언제나 관계의 설계에서 탄생하는 바로 그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EVERY WEEK Editorial 

error: 콘텐츠 보호를 위해 복사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EVERY WEEK 에브리위크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