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는 건 누가 정하는 걸까요?
누군가는 빠르게 성공하는 걸 좋다고 하고, 누군가는 정제된 아이디어, 매끈하게 완성된 결과물을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늘 좋은데 아직 부족해 보인다던다, 좋은데 어딘가 어설프다던가 하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데에만 익숙해지는 게 아닐까요? ‘좋음’이라는 기준 아래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요하네스버그의 실험적인 예술 공간 ‘덜 좋은 아이디어를 위한 센터 (The Centre for the Less Good Idea)’ 를 소개합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덜 좋은 아이디어를 위한 센터(The Centre for the Less Good Idea, 이하 CFLGI)’는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와 브론윈 레이스(Bronwyn Lace)가 2016년에 설립한 실험적 예술 기관이자 인큐베이터입니다.
이 독특한 이름은 ‘좋은 의사가 고치지 못하면 덜 좋은 의사를 찾아가라(If the good doctor can’t cure you, find the less good doctor.)’는 뜻의 아프리카 츠와나족 속담에서 유래했는데요. 프로젝트의 초기에 좋은 아이디어가 현실에 부딪혀 균열이 생길 때, 그 틈새에서 나온 덜 좋은 아이디어를 따라가 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윌리엄 켄트리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부분 좋은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엔 모든 게 아주 명확해 보이죠.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실제로 꺼내어 펼쳐보면, 그 표면에 금이 가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균열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2차적인 아이디어—처음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생겨난 덜 완벽해 보이는 생각들—를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디어와 함께 놀다 보면, 미처 몰랐지만 어딘가 내면 깊은 곳에서 알고 있던 무언가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기존 무대나 갤러리에선 환영받기 어려운 짧은 형식의 실험적인 작품을 마음껏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도록 ‘멍청해질 수 있는 안전지대’를 예술가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설립된 이듬해 2017년 3월에 첫 번째 시즌 공연을 시작으로 실험, 협업, 즉흥성을 핵심 가치로 하는 4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Seasons는 1년에 두 번 열리는 CFLGI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각 시즌마다 여러 편의 짧은 공연과 프로젝트를 묶어 선보입니다. 연극, 무용, 음악, 퍼포먼스 아트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수의 작품들이 한 시즌에 동시에 진행되는데요. 연말에는 며칠에 걸쳐 관객을 대상으로 연속 공연이 열립니다. 각 시즌에는 해당 시즌의 큐레이터와 참여 예술가들의 창의적 실험이 응축되어 있으며, 종종 시즌별로 주어지는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공연을 만들기도 합니다.
For Once는 정규 시즌과 별도로 매달 또는 수시로 개최되는 1회성 공연 시리즈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새로운 작품을 단 하룻밤 동안 무대에 올리기 위해 외부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초청하여 선보이는데요. 센터와 지속적으로 협업해온 예술가들의 신작 발표회가 열리기도 하고, 해외의 예술가나 단체가 기존에 만든 작품을 가져와 센터의 공간 안에서 실험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For Once 무대에 오른 작품들은 데뷔 음악 공연, 장편 연극, 숏폼 신체극,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퍼포먼스 등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센터에서 일회 공연을 마친 후 더 발전되어 외부 무대로 진출한 사례도 많은데요. 최근에는 <The Highway Notice Project>, <The Long Minute>, <A Kafka Moment>와 같은 독특한 일회성 실험 프로젝트들이 For Onc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SO Academy는 2020년에 출범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무용가이자 교육자인 아테나 마자라키스가 디렉터를 맡아 이끌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을 위한 멘토십, 워크숍, 수업 등을 통해 창작 역량을 심화시키는 것이 목적인데요. 아카데미에서는 참가 예술가들이 개별 작품을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돕는 실습 중심의 클래스와 멘토 연계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Thinking in>, <In Conversation> 시리즈를 통해 예술적 사고를 공유하고, <How-Showing the Making>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창작 과정을 공개 시연하여 관객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센터는 단순히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교육과 담론 형성까지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The Centre Outside the Centre는 브론윈 레이스의 주도로 진행하는 국제 예술 교류 프로그램입니다. 자국 예술가들의 기회를 넓히기 위해 추진하는 대외 활동인데요. 요하네스버그라는 지역적 기반이 가지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적극 활용하여 해외의 예술 기관, 축제, 학교 등과 협력함으로써 남아프리카 예술의 입지를 넓히는 것이 목표입니다. 2024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Fondation Cartier)과 협업하여 약 20여 명의 남아공 및 국제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집중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열었습니다. 페퍼스 고스트(Pepper’s Ghost) 홀로그램 극법을 활용한 퍼포먼스, <Sizendlebe | We are Ears>라는 실험적 음악극 등 다양한 쇼케이스를 파리의 관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또한 2025년 2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주일간의 레지던시를 열어, UCLA 공연센터, 더 브로드 미술관 등과 함께 현지 관객들에게 센터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활동을 통해 CFLGI가 개발한 작품들을 해외 무대에 올리고, 다른 환경에서 센터의 예술적 방법론을 시험함으로써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새로운 실험을 위한 피드백을 얻는 중요한 채널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CFLGI의 활동에는 탈식민주의적 감수성과 문화적 재현의 이슈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름의 유래가 된 속담은 남아공의 저명한 흑인 지식인 솔로몬 플라치예(Solomon T. Plaatje)가 전한 츠와나어 격언에서 따온 것인데요. 서구 중심의 ‘최선의 해결책’ 담론 대신에 토착 문화의 지혜와 대안을 존중하는 이 이름 자체만으로도 지역 고유의 언어와 지식을 예술 담론의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상징적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센터에서 인큐베이팅된 작품들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정체성을 독창적으로 조명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예를 들어, 카메룬 작가 페르디낭 오요노(Ferdinand Oyono)의 1956년 소설을 각색한 공연 <Houseboy>는 식민지 시대 흑인의 삶을 그의 일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으로, 요하네스버그의 센터에서 앙상블 캐스트에 의해 개발되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2017년에는 세계적인 탈식민 이론가인 호미 케이 바바(Homi K. Bhabha)를 초청하여 윌리엄 켄트리지와 함께 ‘걷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무거운 삶의 짐’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비공식 담화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센터는 남아프리카 및 범아프리카 지역의 고유한 서사를 예술로 풀어내서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지역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로컬 예술 생태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CFLGI가 보여주는 창작 방식은 기존 제도권 예술 기관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전통적으로 미술관, 상업 화랑, 프로 극장 등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별하여 전시·공연하고, 작품의 시장성이나 평론가들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반면에 CFLGI는 애초에 완결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완성의 실험 과정 자체를 공유하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창작의 결과물을 판매하거나 대중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보다 모험적이고 파격적인 시도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운영 모델은 예술 생태계의 중심을 거대 기관에서 작은 창작 공동체들로 분산시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술 창작과 지원이 하나의 거대 조직이나 시장 논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독립적인 실험 공간들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연계되는 분산형 생태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술 생산과 향유의 방식에 있어 기존 제도권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동시대 예술의 창작 생태계 다변화와 지식 생산의 탈중앙화의 관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일상 깊숙이 파고들고, 생산성과 효율이 극단적으로 최적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평면적인 사고 구조 안으로 희석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은 속도로, 비슷한 방식으로, 정답을 빠르게 내놓는 능력이 중요해진 사회랄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과 관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기준과 세계관은 점점 더 소중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좋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요?
‘좋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완성도와 효율성, 시장성과 호응 같은 잣대에 기대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술은 늘 중심에서 멀어진 곳에서, 예측할 수 없는 실수와 시행착오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의 중심은 ‘나’에서 출발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까요?
글
EVERY WEEK Edito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