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언제나 가능성의 생태계였습니다. 수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 미처 빛을 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것들이 쌓여 있는 곳이지요. 작고 얇고 연약한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시간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가능성들을 너무 쉽게 지나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나,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잔해에서도 아직 꺼지지 않은 생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이번 주에는 버려지는 해초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Less, Light, Local’ 을 소개합니다
‘Less, Light, Local(이하 LLL)’은 일본의 위플러스(WE+)가 기획한 연구 기반 디자인 프로젝트 입니다. ‘Less, Light, Local’이라는 이름은 적게(Less) 소비하고 가볍게(Light) 설계하며 지역(Local) 자원을 활용하겠다는 철학 아래에서, 해조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핵심인데요.
위플러스(WE+)는 2013년 도쿄에서 설립된 디자인 스튜디오로, 일상 속 자연 현상과 전통적 가치에 착안한 대안적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물, 바람, 빛과 같은 자연 현상을 새로운 재료를 통해 감각적으로 포착하거나, 도시의 폐자원을 주제로 하는 실험적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위플러스는 일본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다양한 해조류의 새로운 잠재력을 탐색했고, 그 중 이타노리에 주목하여 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타노리(ITA NORI, 판김)는 전통적으로 스시나 오니기리(주먹밥)를 싸는 데 쓰이는 김의 일종으로, 전통적으로 간을 하지 않은 네모난 형태의 건조된 해조류 시트인데요. 일본이 세계 최대의 해조류 소비국인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식용 해조류를 가공해왔는데, 그 중 이타노리는 에도 시대(1603~1868)에 일본 전통 한지 제조 기법을 응용하여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나무 발로 해조를 뜬 뒤 말리는 방식은 종이뜨기와 유사하여, 김 생산 과정 자체가 일본의 공예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기후 변화로 바닷물 온도가 상승하고 해양 생태계가 변하면서, 일부 양식 해조류는 충분한 영양을 얻지 못해 빛이 바래거나 얇게 자라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상품성이 없는 이러한 해조들은 상당량이 식품 유통에서 제외되어 소각 폐기되는데, LLL 프로젝트는 이렇게 버려지는 김에 미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해양 폐기물의 처리 문제와 지역 자원의 활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함께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위플러스는 이타노리 소재의 얇고 질긴 섬유질 구조에 주목했습니다. 한지 제작에서 유래한 해조 시트인 만큼 재료 자체의 잠재력이 높다고 보고, 별도의 화학 가공 없이도 해조류만으로 물성을 형성하는 실험을 계속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해조 섬유질을 그대로 건조한 시트는 독특한 질감과 은은한 광택을 지니는데, 여기에 천연 풀(녹말 등)을 소량 결합하면 소재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해조류만으로도 종이나 목재와 같은 다목적 자재로 활용될 수 있으며, 친환경 접착제 등을 병행하면 실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이타노리를 종이의 대체재로서 응용하는 방안을 탐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퇴색된 김 시트 특유의 색상과 질감의 변화를 디자인 요소로 삼아 격자무늬 한지창(쇼지)처럼 조명 패널을 구성하고, 때로는 김 시트를 원형 등 기하학적인 모듈로 잘라 와이어에 매다는 등의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 소재를 형태별로 결합하는 데에 있어서는, 일본 전통 건축에서 빛을 산란시키는 와시지(和紙紙)나 쇼지문의 구성 원리에서 착안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프로토타입들은 벽걸이형 조명판, 입체적 조명 상자, 천장에 매다는 모빌의 형태를 통해 경량성과 반투명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아라카와 & 컴퍼니(Arakawa & Co., Ltd.)는 LLL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 중 하나입니다. 아라카와는 1975년에 개발한 와이어 걸이 장치 “아라카와 그립(ARAKAWA GRIP)” 으로 유명한 일본 기업으로, 이 기술은 전세계의 미술관과 전시 공간에서 널리 쓰이는 와이어 서스펜션 시스템인데요. 아라카와는 설치와 조명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이타노리라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는 위플러스의 연구 프로젝트에 협업하였으며, 이 프로젝트를 창립 50주년 기념 프로그램인 50 GRIPS의 하나로 지원했습니다.
아라카와 그립은 얇은 금속 와이어와 특수 잠금장치를 이용해 다양한 재료를 공중에 고정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별도의 나사나 프레임 없이도 손쉽게 위치 조정과 고정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와이어 서스펜션 기술은 일반적으로 유리, 목재, 아크릴판 등을 전시할 때 쓰이는데, 위플러스는 이 기술에 버려진 해조 시트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얇고 넓은 김 시트를 와이어로 잡아당기거나 매달 경우 장력에 견딜 수 있을까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타노리는 생각 이상으로 질긴 특성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유연하게 휘어지는 곡선미를 연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팀은 아라카와 그립의 미세한 높이 조절 기능을 활용해 이타노리 조각들의 밀집도와 겹치는 정도를 세밀하게 조정해서, 빛에 따라 투명도와 색감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연구했는데요. 예를 들어 여러 장의 이타노리를 겹친 부분은 짙은 녹갈색의 불투명 면을 이루고, 한 겹만 있는 부분은 밝은 초록빛으로 반투명하게 빛을 투과하는 식입니다.
아라카와 이외에도 쇼지(Shoji) 전문 기업인 키토테(KITOTE), 산업용 메쉬 전문 기업 NBC 메쉬텍(NBC Meshtec) 등의 기업이 소재와 기술 측면에서 참여했고, 일본 수산업 협동조합연합회 등 해양 관련 단체의 후원을 통해 밀도 높은 프로젝트로 완성되었습니다.
Less, Light, Local 프로젝트는 지역의 잉여자원을 아름답고 실용적인 형태로 만들어 다른 가치로 치환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전통 종이 공예에서 비롯된 김 제조법을 현대적인 소재의 실험으로까지 발전시킨 맥락은, 지역 문화유산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요. 일본은 해조류 생산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식품 이외의 활용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해조 폐기물의 잠재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도 마찬자가지입니다.
특정한 산업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던 가공기술을 건축자재나 제품소재로 응용하는 것은 분야의 경계를 뛰어 넘어 자원을 활용하는 시도가 늘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잠재력을 보여줍니다. 위플러스 역시 앞으로 해조 기반 소재를 더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한지나 가죽 을 대체할 친환경 신소재를 선보이겠다는 비전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의 최근 동향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어서, 일회성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글로벌 단위의 지속가능한 디자인 운동의 경향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2025 마드리드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조르지 페냐데스(Jorge Penadés)가 버려지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를 사용한 가구를 만드는 Uprooted 프로젝트나, 네덜란드의 휴먼 머티리얼 루프(Human Material Loop)가 미용실에서 버려지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Human Hair Sweater와 같은 프로젝트도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지역의 이슈를 찾아내고, 그것을 일상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시도들은 이제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거창한 기술이나 눈에 띄는 혁신이 아닐지 모릅니다. 지나치기 쉬운 것들, 세상의 기대에도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새로운 생태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합니다.
하지만 세계는 언제나 그런 것들 위에 쌓여 왔습니다. 관심의 그늘에 있는 작고 연약한 가능성들이, 언젠가 가장 단단한 세계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작은 가능성 앞에 다시 멈춰서기 위해서는, 사라지는 것들의 속도를 따라갈 인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글
EVERY WEEK Edito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