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짜리 지역 만들기

물리적이든 관념적이든 대부분의 경우에 제약은 생각의 출발점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스스로와 동료들에게 물어보죠.

“이 정도 예산으로 가능할까?”
“그건 원래 저런 방식으로 하는 거야.”
“그건 너무 작지 않아?”

그 질문들은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능성에 경계를 긋는 말들입니다. 그럴때면 아이디어를 만든다는 건 종종 그 경계에 뭔가를 ‘끼워 맞추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한정된 조건, 익숙한 구조, 검증된 수치 안에서 결과를 뽑아내야 하는 상황.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상상하지 않도록’ 훈련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파는 번뜩이는 거창한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진짜 상상력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두 세계를 단순히 ‘연결’해보는 데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기존의 것들, 낯선 조각들, 이전에 조합해본 적 없는 방식들. 그것들이 느슨하게 엮이면서 어느 순간 예상하지 못한 감각이 발생합니다. 그건 누구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새로움을 만들어냅니다.

어쩌면 우리가 새로움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로움이 발생할 수 있는 조합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자판기 브랜드 ‘후루사토 아큐아(Furusato Acure)’ 소개합니다.

지하철 플랫폼에 설치된 아큐아(Acure) 자판기 ⓒShutterstock

‘후루사토 아큐아(ふるさとアキュア)’는 JR동일본(JR東日本) 그룹의 자회사인 JR동일본 크로스 스테이션 워터 비즈니스 컴퍼니(JR Cross Water Business Company)가 2024년 11월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고향(Furusato)의 매력(Acure)을 연결하는 자판기’를 콘셉트로, 역 내 자판기 브랜드 acure(아큐어)의 확장형인 이벤트 아큐어 시리즈 중 하나로 기획되었죠. 각 지역의 특산품을 테마별로 선보이는 ‘자판기 형태의 안테나숍’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우선 후루사토 아큐아를 담당하는 워터 비즈니스 컴퍼니의 태생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JR동일본 크로스 스테이션은 2021년 4월 1일, JR동일본 산하 역 관련 4개 자회사를 통합해 출범한 완전 자회사로, 역(Station) 공간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조직입니다. 리테일, 푸드, 자판기, 상업시설 개발 등 다양한 역 내 비즈니스를 하나로 묶어 시너지와 효율을 높이는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크로스 스테이션(Cross Station)’이라는 사명에는 다양한 업태와 사람의 ‘교차’를 만들어간다는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2025년을 기준으로 이 회사는 약 3,000명의 직원을 두고 JR동일본 관내 약 2,000개의 점포, 1만 2천 대의 자판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4년 기준 연간 영업수익은 2,668억 엔, 점포 매출은 3,851억 엔에 달해 일본 최대급 역 비즈니스 운영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어요

이 중 후루사토 아큐아를 기획한 워터비즈니스 사업부문은 자판기(VM) 운영과 음료 상품 개발을 담당하며, JR동일본 자판기의 통합 브랜드인 아큐아(acure)를 통해 다양한 음료 자판기를 관리합니다. ‘From AQUA’ 같은 자체 음료 브랜드도 자체 개발한 대표적인 제품이에요. 신칸센 개통을 위한 터널 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솟아난 지하수를 제품화한 것인데요. 이처럼 워터 비즈니스 컴퍼니의 사업은 JR동일본의 지역 재발견 프로젝트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루사토 아큐아 프로젝트 역시 지역 원재료를 활용한 음료 개발을 지속하는 연장선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즉, 자판기를 통해 도시 승객과 지역 특산물을 연결하고, 이를 통해 지방 소득과 브랜드를 동시에 키우려는 전략적 실험이라 할 수 있어요.

 

자판기에서 판매되는 PB 상품 브랜드 '아큐아 메이드(Acure Made)' ⓒJR Cross

후루사토 아큐아는 JR동일본의 자체 자판기 브랜드 ‘아큐아(Acure)’의 라인업 중 하나인데요. 아큐아는 단순한 자판기가 아니라 아주 작은 편집샵처럼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순간에 어울리는 제안을 전하는 자판기 브랜드입니다.

예를 들어, 두유 전문 자판기인 ‘플러스 아큐아 두유(Plus Acure)’, 학생들이 선호하는 음료로 구성한 ‘스쿨 아큐아(School Acure)’, 기간과 테마에 따라 판매 제품이 달라지는 ‘이벤트 아큐아(Event Acure)’, 아큐아의 소비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획한 PB브랜드 ‘아큐아 메이드(Acure Made)’ 등이 있죠. 이처럼 아큐아는 소비자의 니즈는 물론, 자판기가 설치된 역 주변의 지역적 특성까지 디테일하게 반영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큐아는 이러한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어요.

“언제나, 그 장소에 있어
만나게 될 때마다 즐거워지는.
그러한 당신의 매일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
한 명 한 명 진지하게 마주하면서도
유희의 마음이 넘쳐나는 제안을 전해드립니다.”

특히 ‘이벤트 아큐아’는 계절이나 이벤트에 맞춰 콘셉트를 설정하고, 다양한 상품을 전개해 나가는 구조예요. 백화점의 행사 공간처럼 테마에 따라 매번 달라지고, 편의점의 매대처럼 화제를 노린 상품군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기존 자판기 운영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유통 실험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파트너십 구조는 기본적으로 지자체 또는 생산자와 JR 측의 협업 모델로, 무엇보다 음료에만 머무르지 않고 식품, 가공품, 기타 지역 특산품까지 다룬다는 점이 눈에 띄는 지점이에요. 이 ‘이벤트 아큐아’의 새로운 기획 라인으로 2024년 10월에 새롭게 등장한 브랜드가 바로 ‘고향(후루사토) 아큐아’ 입니다.

자판기를 통해 판매하는 지역 특산품 쌀 ⓒJR Cross

후루사토 아큐아의 첫 번째 파트너는 인구 약 5,000명의 마을, 후쿠시마현 텐에이촌(天栄村)입니다. 쌀 수확 시즌에 맞춰서 ‘세계 최고 수준의 쌀’로 불리는 ‘텐에이마이(天栄米)’를 자판기를 통해 선보였어요. 이 쌀은 ‘쌀·식미 감정 콩쿠르: 국제대회’에서 금상을 총 12회 수상한 고급 브랜드 쌀입니다. 2024년 10월부터 2025년 3월까지, JR동일본 주요 역사 내 아큐아 자판기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고요. 여기에 더해 텐에이촌의 쌀을 활용해 만든 카레와 향신료 세트를 증정하는 경품 이벤트도 함께 열렸습니다. 단순한 제품 소개를 넘어, 지역성과 연결된 스토리를 구성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파트너는 군마현 미나카미마치입니다. 간토 지방 북단, 다니가와다케와 미쿠니산 자락, 도네강 수계에 위치한 이 마을은 ‘관동의 물병’이라 불릴 만큼 수자원이 풍부하고, 온천과 자연이 인상적인 지역이에요. 여기서는 지역 생산 브랜드들의 생활용 제품이 라인업에 올랐습니다. Local Earth의 야마자쿠라 벌꿀, SUMIKA의 룸 퍼퓸, Licca의 아로마 스프레이가 각각 시기를 나누어 자판기를 통해 판매되었는데요. 특히 벌꿀은 불필요한 가공을 하지 않은 100% 천연 꿀이고, 향수와 아로마 스프레이는 숲 속의 작은 공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증류해 만든 제품입니다. 2025년 10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운영되는 시즌 한정 구성이었어요.

흥미로운 점은, 후루사토 아큐아가 단순히 잘 알려진 지역 특산품만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는 아니라는 점이에요. 지역 고유의 개성이나 소재를 담고 있다면, 그게 공예품이든 향기 제품이든 상관없이 폭넓게 다룬다는 것이죠. 또 자판기 자체를 하나의 작은 지역 정보 플랫폼처럼 꾸미고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상품이 진열된 공간 외에 해당 지역의 이미지, 지도, 교통 정보는 물론, 기차로 가는 시간, 주변 명소와 문화 요소까지 안내되고 있거든요. 철도 회사답게 자판기 너머에 있는 지역에 대한 ‘접근성’의 개념과 관계를 굉장히 잘 설계한 느낌입니다.

운영 전략 면에서도 아큐아는 일반 자판기와 조금 다릅니다. JR동일본에 따르면, 아큐아 자판기에서는 연간 약 2억 건의 구매 데이터가 수집되고 분석되고 있어요. 시간대, 이용자 특성, 위치별 소비 패턴 등을 바탕으로, 자판기 한 대마다 다른 구성을 설계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판기 하나하나가 작은 맞춤형 점포처럼 운영되는 셈이죠. 워터비즈니스컴퍼니의 운영 담당자 카네모토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을에서 겨울,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는 판매 상품의 온도대를 핫에서 콜드로, 혹은 그 반대로 바꿔야 해요. 데이터상으로는 전환 시점을 설정할 수 있지만, 최근 기온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고 예측이 어렵습니다. 결국 자판기를 채우는 오퍼레이터의 경험과 현장감각이 중요해요.”

이처럼 데이터와 현장의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큐아가 자판기 이상의 브랜드로 기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상 어딘가에 늘 있는 자판기 ⓒShutterstock

한편으로는, 자판기 하나에 이토록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과한 상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료한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자판기에서 낯선 음료 하나를 꺼내 먹는 그 작고 이상한 선택이 생각보다 먼 일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죠.

매일 마시던 음료가 어느 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익숙했던 맛의 원산지가 문득 궁금해질 수도 있습니다. 여행지 후보 목록에 이름 하나를 적는 것, 그것이 진짜 여행이 되고, 언젠가 그 음료를 만든 사람과 직접 마주치게 되는 것. 그 지역의 공기와 풍경을 지나치다가, 나중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다시 오게 되는 것. 혹은 아예 그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일.

어쩌면 가능성이란 건 제약의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를 비춰주는 일종의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둘 중 하나가 먼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그 경계 바깥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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