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에도 없는, 어느 곳에나 있는

도시의 흐름은 대부분 예측 가능합니다. 출근길과 퇴근길, 익숙한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주어진 공간에서 소비하는 일상처럼요. 그러나 가끔 우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콘크리트 사이에 피어난 꽃, 우연히 마주친 옛 친구,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거리의 공연들. 찰나에 가까운 이런 순간들은 대부분 스쳐가서 기억에도 남지 않지만, 마음에 빈 공간이 조금 남아있는 날에는 예상치 못한 의미로 다가오곤 합니다. 꽃을 보고 새로운 취미를 시작한다거나, 오랜 친구 덕에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문득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죠. 

이번 주에는 전 세계를 여행하는 찻집 ‘게릴라 티룸(Guerrilla Tea Room)’을 소개합니다.

뉴욕 타임스퀘어의 게릴라 티룸 ⓒPierre Sernet

게릴라 티룸(Guerrilla Tea Room)은 뉴욕의 아티스트이자 사진작가 피에르 세르네(Pierre Sernet)가 2003년에 시작한 작품 ‘One‘ 시리즈의 별명입니다.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큐브 모양의 일본식 다실을 세계 곳곳을 돌며 임시로 설치하고, 다양한 문화권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무작위로 초대해서 차 한 잔을 나누는 순간을 기록한 사진 작품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피에르 세르네는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아뜰리에(Ateliers du Carrousel of the Musée du Louvre)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미술 데이터베이스 아트넷(artnet.com) 의 창업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2003년 1월 1일부터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아트 섹션을 통해 ‘One’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세르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저는 인터넷에 익명으로 폭력적인 게시물이 퍼지면서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중략)

당시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적어도 예술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 문화, 생활 방식에 대한 무례함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굴(Faces), 사랑(Love), 죽음(Death), 국적(Nationality), 성(Sex)에 대한 다섯 가지 다른 시리즈를 진행했는데, 모두 장소와 시간에 걸쳐 인류의 공통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엘리스와 함께 ⓒPierre Sernet

게릴라 티룸이 흥미로운 이유는, 특정한 지역에서 경험한 감각이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역성을 한정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봅니다. ‘이곳에서만 가능한 경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르네는 게릴라 티룸을 통해 한 장소에서 경험한 감각이 전혀 다른 지역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열었던 티룸들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경험의 본질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손으로 직접 쓴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 조용한 공간에 앉아 느리게 우러나는 차를 기다리는 시간, 낯선 이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바쁘게 흐르지 않는 도시의 리듬으로 말이죠.

이러한 경험들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감각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게릴라 티룸은 가장 지역적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공간이 되는 셈인데요. 이것은 게릴라 티룸의 또 다른 이름인 ‘One’ 의 의미와 연결됩니다. 

“일본의 다도는 선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선불교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 사는 것이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니다. 19세기 정치가이자 차인이었던 이이 나오스케가 만든 ‘이치고, 이치에’라는 속담에도 이러한 정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이름인 ‘One’은 전 세계 사람들과 한 번 만난 것을 말합니다. 차와 함께 하는 만남의 독특함을 통해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는 각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고, 종종 지구의 긴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덧 없는지 잊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고 이것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에르 세르네가 인용한 ‘이치고 이치에( 一期一会, 일기일회)’는 ‘차를 내릴 때에는 일생에 단 한번 있는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을 한다’는 뜻으로, 다도에서 유래한 일본의 속담 중 하나 입니다.

하와이 선셋 비치에서 말콤과 함께 ⓒPierre Sernet
후지가와 공장에서 스기모토, 와타나베와 함께 ⓒPierre Sernet
인도 자이살메르에서 케스, 메인데비와 함께 ⓒPierre Sernet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섀넌과 함께 ⓒPierre Sernet
중국 상하이에서 쿠오 춘과 함께 ⓒPierre Sernet
태국에서 파다응과 함께 ⓒPierre Sernet
파리 팔레 드 도쿄에서 다니엘, 실비와 함께 ⓒPierre Sernet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데이비드와 함께 ⓒPierre Sernet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신야와 함께 ⓒPierre Sernet

게릴라 티룸은 한 도시에서 열렸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도시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런던, 뉴욕, 도쿄, 베를린—그의 티룸은 어디에서도 열릴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티룸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곳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게릴라 티룸은 지역성과 장소성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니다. 우리는 흔히 지역성을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특수한 감각으로 이해하지만, 세르네는 이것을 다르게 바라봤습니다. 그는 차(茶)라는 매개체를 통해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고, 같은 감각을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유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음을, 그리고 결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오래된 가게가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공간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게릴라 티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서 차를 마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남아 있습니다.

세르네는 장소성을 단순한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감각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그의 티룸이 특정한 공간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어디에서든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게릴라 티룸은 어느 곳에도 없지만, 어느 곳이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만 먹으면 나만의 새로운 게릴라 티룸을 열 수 있지 않을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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