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부터 한 지역에 오랜 기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네가 변해온 과정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할 것이다. 재미있는 건 동네가 변하는 속도다. 조금만 주변을 관찰하면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는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핵심은 사람이다. 거리에 사람이 많아지면 지역은 바뀌기 시작한다. 지하철역이 생기거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거나, 대형 마트나 쇼핑몰이 들어서면 그러한 변화가 생긴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건물, 로컬 브랜드나 축제와 같은 무형의 프로젝트로 인해 지역에 새로운 색깔이 생기기도 한다.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힐즈, 프라다와 오프화이트, 몽클레어까지. 도쿄 패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아오야마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브랜드의 공간들이다. 하지만 도쿄를 여행해 본 사람 중에서 ‘패션의 아오야마’ 라고 불렸던 이 거리를 수놓는 면면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0년대의 아오야마는 낡은 건물들 틈에서 젊은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들이 태동하던 수수한 동네였다. 개발을 주도한 탄광회사 태평양흥발은 프로그램 기획은 하마노물상연구소, 설계와 디자인은 야마시타 카즈마사에 맡겨 팀을 꾸렸다. 프로그램 기획이라는 건 토지를 개발할 때 최적의 쓰임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일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생소한 분야다. 그들은 작은 교차로의 모서리에 있던 이 땅을 아오야마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할 시작점이라는 의미로 ‘프롬 퍼스트(FROM-1st)’라고 이름 붙였다.
아오야마처럼 유행을 따르는 지역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 디자이너, 변호사, 의사, 작가, 건축가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프리랜서들을 위한 거주 공간과 감도 높은 상점들을 수용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생활과 일, 쇼핑이 모두 조화롭게 가능한 미니타운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층에는 상점이 들어서 있고 상부에는 스튜디오 형태의 공동주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거리에 면한 창의 크기는 줄인 대신에 사선 형태의 천창을 계획한 것이 특징이다.
프롬 퍼스트의 거주-업무 공간도 흥미롭다. 설계를 담당한 카즈마사 야마시타의 드로잉을 보면 전체 기획 의도에 맞게 거주와 업무의 기능을 모두 충족하는 입체적인 형태로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이 강한 디자이너를 위한 공간 답게, 개별 작업 공간을 단차와 수납장으로 분리했다. 작업 공간은 거리에서 들여다보이지 않지만 천창을 통해 충분한 햇살을 받을 수 있다. 2층 구석 구석에는 소파나 원형 벤치, 스툴과 다이닝 테이블을 두어 서로 언제든지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깥으로 나가면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화단과 테라스가 펼쳐진다.
프롬 퍼스트를 시작으로 아오야마는 이세이 미야케, 비기, 요지 야마모토, 꼼 데 가르송을 중심으로 한 DC 브랜드들의 성지가 되었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아오야마 거리에서의 존재감은 여전한 듯 하다. 그 힘은 시대를 초월하는 디테일에 있다. 안쪽에 숨겨진 중정에 떨어지는 햇살, 구석구석 보석 같은 공간을 찾아다니는 경험과 보행자의 눈높이에 맞춘 적정한 비례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정에 들어서면 꽃에 물을 주는 가게 직원과,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 잠깐 바람 쐬러 집에서 나오며 기지개를 켜는 사람이 함께 하는 생경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아오야마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이세이 미야케를 비롯해 이마바리 타월, 프랑스 풍의 카페 피가로, 안경 가게, 도자기 상점, 꽃집, 침구 매장과 헤어샵, 수집 용품점 등 일상과 가까운 카테고리의 감도 높은 브랜드로 가득 채워져 있다. 지역을 바꿔놓은 과거의 영화는 차치하더라도 프롬 퍼스트라는 이름 이상의 의미로 동네 깊숙이 뿌리내렸다.
도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새로운 공간과 콘텐츠를 발견하고 지역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려는 유의미한 시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동안 동네에서 경험하지 못한 생활 양식과 풍경을 만들어 가고 있는 로컬 비즈니스라면 깊게 들여다 볼 만한 프로젝트다.
글
EVERY WEEK Edito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