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기억과 정취로부터

슈페르킬렌 공원 ⓒ Iwan Baan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태어난 사람은 많지 않다. 도시에서는 더 그렇다. 각자의 이유로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지역에 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장소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같은 나라에서도 사는 동네가 바뀌면 한동안은 낯선 기분을 느끼기 마련인데, 하물며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된다면 어떨까. 여행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고향에 대한 감정은 더욱 깊이 남게 된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동네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1993년 뇌레브로 폭동 ⓒ Wikimedia

90년대 코펜하겐은 난민 수용과 유럽 연합 가입 등의 이유로 벌어지는 시위와 폭동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뇌레브로는 그 중에 가장 큰 폭동이 벌어졌던 동네다. 오래전부터 낙후된 지역이었는데, 이민자와 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마약과 범죄의 온상이었던 이 지역은 지금까지도 ‘코펜하겐의 게토’라고 불린다.

당시 뇌레브로에는 오래 전 철도 노선이 해체된 채 방치된 땅이 있었다. 동네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750미터 길이의 버려진 공간이었는데, 양쪽으로는 꽤나 활기찬 상점가들이 있었다. 코펜하겐 시는 이 공간을 동네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열쇠라고 보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모았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쐐기라는 의미로 ‘슈페르킬렌’ 으로 정해졌다. 덴마크어로 ‘거대한 쐐기’라는 뜻이다. 

리서치와 기획은 코펜하겐의 아티스트 그룹 Superflex, 건축은 비아케 잉겔스가 이끄는 BIG, 조경은 독일의 Topotek-1이 맡았다. 팀의 조합도 상당히 흥미롭다. Superflex는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전위적이고 선언적인 작업들을 세계 각국에 선보여왔다. BIG는 실험적이고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건축가들 사이에 이름을 올린 덴마크의 젊은 건축가다. Topotek 1은 베를린을 기반으로 수준 높은 공공 공간들을 만들어온 조경 회사다. 셋의 조합만큼이나 이들을 선택한 코펜하겐 시의회의 기획적인 마인드도 인상적이다. 

 

주민들의 고향에서 모은 것들 ⓒ Public Space

이들이 발견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임과 동시에 가장 잠재력 있는 지역만의 고유한 특징은 ‘문화적 다양성’이었다. 60여 개국에서 모인 주민들 자체가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 1년이 넘게 주민들과 대화하며 무엇이 그들의 일상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했다. ‘극단적인 참여(Extreame Participation)’라고 이름 붙인 이 과정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인 뿌리와 고국의 정취를 담은 다양한 오브제와 디자인을 모두 모은다는 의미의 ‘세계 박람회’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팔레스타인에서 직접 가져온 붉은 흙 ⓒTorben Eskerod

주민들과 대화하고, 직접 그들의 고국을 함께 여행하기도 하면서 공간을 채울 요소들을 구상했다. 각기 다른 국가에서 모인 오브제와 가구, 간판과 조명, 동상과 미끄럼틀까지 모였다. 자칫 무질서하게 어질러진 장소처럼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배치하기 위한 기준을 세우는 것도 지역에서부터 출발했다. 

좁고 긴 형태의 땅을 크게 세 가지 성격의 공간으로 나누었다. 지역 체육센터와 도서관에 가깝고 스포츠 공원과 이어지는 남쪽은 야외 운동와 문화 활동을 위한 장소로, 기숙사와 카페, 식당이 많은 북쪽은 녹지가 많아 산책하고 쉬어가기 좋은 공원으로 정했다. 남쪽과 북쪽 사이의 공간은 도로에 면하고 있어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광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붉은 광장에는 운동하기에 적합한 충격 흡수용 바닥재와 고무 합성 수지를, 도로에서 이어지는 검은 광장에는 지역 행사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아스팔트를, 녹색 공원에는 산책하기 좋은 마감재와 잔디를 깔았다.

방콕에서 온 복싱 링 ⓒTorben Eskerod
모로코에서 온 분수대 ⓒTorben Eskerod
각자의 고향에서 온 간판들 ⓒTorben Eskerod

자메이카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 방콕의 복싱 링, 노르웨이의 단풍나무, 쿠바의 벤치, 일본의 미끄럼틀, 브라질의 공중전화 부스, 루마니아의 체스 테이블, 모로코의 분수대, 카타르의 치과의사 간판, 스페인의 탁구대, 카불의 그네까지. 

모든 것은 사람 한명 한명의 기억과 자라온 동네의 정취에서 출발했지만, 이것들이 모여 지역의 이야깃거리이자 공동의 생활 공간이 되는 과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축하하는 사람들 ⓒ Hasse Ferrold

슈페르킬렌 파크에서 재미있는 점은 위성 사진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광장 안에서 보는 모습 사이에 있는 큰 괴리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뇌레브로는 여전히 분쟁과 소요가 끊이질 않는 부정적인 동네지만,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뒤섞인 채 살아온 사람들은 지역에 대한 그들만의 애정과 자부심이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외지인으로 이루어진 이 동네에서 덴마크라는 국가의 유럽 연합 가입을 반대하는 큰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반증일 수도 있다. 지역의 본질을 꿰뚫는 듯한 이 과감한 실험은 그 자체로 동네의 유산이 되었다.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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