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인 공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도시에서는 기능을 상실한 시설이나 장소가 많은데, 어떻게 하면 지역의 유휴공간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살고 있는 동네 주변을 둘러보면, 버려진 철로를 공원으로, 석유를 저장하던 탱크를 전시장으로, 고가 도로의 하부를 체육시설로 탈바꿈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시하는 이런 아이디어들이 잘 구현되어 지역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동네의 맥락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기획이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뉴욕시의 피어 파크(Pier Park)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허드슨 강을 따라 선박이 정박하던 수십개의 피어(Pier;교각)들을 지역에 없던 다양한 생활공간으로 재탄생시켜, 그 지역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어 파크의 비전과 목표
1. (법에 서술된) 거대한 수변 공원의 전체적인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공원을 끊임없이 디자인하고 구축해야 한다.
2. 커뮤니티의 자산이자 지역 경제의 동력, 그리고 수많은 뉴욕 시민들과 여행객들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높은 수준으로 공원을 유지하고 운영해야 한다.
3. 공공 교육, 연구 및 생물의 서식지인 수변의 생태 자산을 보호해야 한다.
4.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공원에서 발생하는) 여가, 교육, 문화의 기회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
5. 지속적으로 상업적인 접점을 개발하여, 경제적으로 자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피어 파크의 비전 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피어 파크를 만들어가는 조직입니다. 1998년도에 뉴욕시 법 제정을 통해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Hudson River Park Trust)´라는 운영 조직이 탄생했습니다. 비전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직의 가장 큰 전제 조건은 재정적으로 자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민의 세금 없이 스스로 지역의 공간을 운영하면서 공공의 이익을 획득한다는 강력한 전략이 피어 파크의 모든 기획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구글의 오피스, 뮤지션의 공연과 나이키의 팝업 스토어가 열리는 베뉴, 강이 보이는 카페,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진 거대한 복합 공원이 탄생했습니다. 민간의 입장에서는 공원에 유입되는 다양한 고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공공의 입장에서는 수준 높은 공원의 프로그램과 시설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두 조직의 성격과 역사는 다르지만 지역 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높은 질의 공공 장소를 만들겠다는 비전은 같습니다. 피어 파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피어 몇 군데를 소개합니다.
Pier 40
피어 파크에서 가장 큰 피어입니다.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의 본사가 있는 상징적인 피어이기도 합니다. 가운데에는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열려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광활한 볼파크가 있습니다. 볼파크를 둘러싼 건물은 공영주차장과 크루즈 선착장, 뉴욕 유일의 공중그네 연습장, 그리고 허드슨 강의 다양한 생물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네이티브 아쿠아리움 웻랩(Wetlab)이 위치하고 있는 복합 공간입니다. 퇴근 후 공을 차는 즐거움, 크루즈에 몸을 싣는 설레임, 아쿠아리움에 견학온 아이들의 호기심이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이보다 더 풍성한 도시가 있을까요?
Pier 54 (Little Island)
부두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 1970-80년대 54번 피어는 당시 성장하던 뉴욕 LGBTQ 커뮤니티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86년부터 25년간 인권 축제의 일환으로 기획된 ‘댄스 온더 피어(Dance on the Pier)’의 무대 역할을, 그 이후에도 여름의 축제와 공연이 열리는 뉴욕 문화 베뉴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2012년 뉴욕을 강타한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54번 피어를 비롯해 많은 피어들이 훼손된 이후,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의 파트너 중 하나였던 딜러 본 퍼스텐버그 재단 (Diller von Furstenberg Family Foundation)은 허리케인으로 파괴된 54번 피어를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공공 공간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디자인을 맡은 영국의 토마스 헤더윅은 다른 피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태풍에 날아가고 남은 피어의 기둥들에서 영감을 받아, 피어 자체를 하나의 완결성 있는 예술 작품으로 바라봤습니다. 마치 허드슨 강에 떠있는 거대한 설치미술이나 조각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낯선 형태의 기둥들이 모여 새로운 땅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소수자와 인권을 상징하던 피어 54의 정신을 이어가는 듯합니다. 평평한 뉴욕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인공의 언덕을 만들어 다양한 높이에서 강과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산책길과, 강을 배경으로 공연을 바라볼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을 만들어 일상적인 활동부터 비일상적인 행위까지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냈습니다.
Pier 57
1952년에 만들어진 57번 피어는 미국 국립사적지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건축 당시 혁신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교각입니다. 다른 피어와 달리 물 속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어진 기초가 지지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때문에 보다 더 많은 하중을 견딜 수 있어서인지 한동안은 뉴욕의 버스 주차장으로 쓰였습니다. 현재는 기존 건물의 리모델링이 진행중인데, 공사가 끝나면 시티 와이너리(City Winery)와 구글이 둥지를 틀 예정입니다. 뉴욕 중심부를 떠나 허드슨 강의 중심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시티 와이너리의 창립자 Micheal Dorf의 ‘판데믹 시대에도 일상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겠다’는 선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연장과 콘서트 홀, 와인 바와 카페, 업무 공간과 옥상 정원이 어우러진 활기찬 장소가 될 것 같습니다.
Pier 59~61 (Chelsea Piers)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을 배웅하고 맞이했던 첼시 피어는 여느 피어들과 마찬가지로 쇠락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허드슨 파크와 브루클린 브릿지 파크의 논의가 시작될 무렵 첼시 피어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었습니다. 이무렵 설립된 ‘첼시 피어 매니지먼트(Chelsea Pier Management. Inc)’는 교통부와 피어에 대한 임대 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첼시 피어 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복합시설은 1995년부터 단계적으로 조성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실내 수영장과 암벽등반장, 체조연습장, 아이스링크,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골프 연습장과 피트니스가 갖춰진 복합 체육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거기에 더해, 보육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어린이 운동 프로그램과 리그를 연계해서 운영하고, 웨딩홀과 대회의장 등 도시의 일상에 꼭 필요한 지원 시설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뉴욕 중심부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큰 공간을 활용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갖춘 첼시 피어는 20년 넘게 많은 뉴요커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로 자리잡았습니다.
Pier 17
먹거리가 가득한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지역과 해양 박물관에 접하고 있는 피어 17의 잠재력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꼭 거쳐가는 시포트 거리의 활발한 분위기를 더 극대화할 수 있는 이벤트 베뉴로 기획되었습니다. 다리와 도시의 야경을 조망할 수 있는 옥상 공간을 활용한 공연장은 이미 빌리 아일리시 등 트렌드의 첨단에 서있는 여러 뮤지션들이 거쳐갔습니다. 유럽과는 달리 광장보다는 거리를 중심으로 계획된 도시이다 보니 뉴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야외의 탁 트인 공연장이 주는 공간감이 매력적입니다. 옥상을 받치는 하부의 공간에는 박은주 쉐프님이 운영하는 쌈바(Ssäm Bar)를 비롯해, 시포트 지역의 맥락에서 이어지는 다양한 식당들이 자리잡았습니다. 허드슨 강을 바라보는 식당들의 널찍한 테라스와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는 광장도 피어 17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Pier 6
브루클린 브릿지 파크에 속해 있는 6번 피어는 특히 아이들과 함께 하기 좋은 놀거리로 가득합니다. 바위 언덕을 따라 내려오는 신기한 미끄럼틀, 작은 계곡에서의 물놀이, 독특한 형태의 그네로 가득한 길, 푹신한 모래 사장에 있는 통나무 집 등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터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거기다 강을 바라보는 테라스를 갖춘 식당도 있고, 가져온 도시락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피크닉 공간, 도심 속에서 비치 발리볼을 즐길 수 있는 전용 경기장, 반려견이 목줄 없이 뛰어 놀 수 있는 도그런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공원에 나무와 벤치만 있는 게 아니라,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다양한 여가 생활을 지원하는 지역의 인프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피어입니다.
30년, 40년 뒤에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유연함이 피어 파크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연함은 시민들로 하여금 피어 파크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오래오래 활기찬 지역의 장소로 남아있을 것만 같은 신뢰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단단한 기획과 유연함을 바탕으로 공공과 민간, 자연과 도시가 만나는 흥미로운 실험의 장, 피어 파크가 주는 영감이 한국의 로컬 환경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글
EVERY WEEK Edito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