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것들에 대한 찬미

매일 아침마다 걷는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차이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일정한 리듬으로 드리우는 가로수의 그림자, 늘 붐비는 거리에서 불쑥 들려오는 웃음소리, 오래 본 듯 낯선 표정으로 서 있는 이웃의 모습까지. 익숙한 풍경은 한 걸음만 물러서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요. 햇살은 그저 빛이 아니라 계절의 각도를 알려주고, 가족과 친구와의 대화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서로를 이어주는 최소한의 약속이 됩니다.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사실은 오늘을 지탱하는 단서였음을 깨닫는 순간, 평범한 하루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미 거기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보는 눈만 있다면 일상은 끊임없이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처럼요.

이번 주에는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는 브랜드 손모(Sonmo) 소개합니다.

손모의 시그니처 제품인 올리브유 ⓒStephanie Stamatis

손모(Sonmo) 프로젝트는 스페인 마요르카 섬 발데모사(Valldemossa) 지역에 위치한 역사적인 산악 농장 손 모라게스(Son Moragues)를 재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는 유서 깊은 농장의 토지와 전통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복원하고 현대에 맞게 되살리는 것인데요. 500년이 넘은 농장 부지를 재생함으로써, 과거 두 세기 전의 생활방식 – 즉 지역 땅이 주는 자원에 기반해 자급자족하고 장인 정신이 깃든 삶 –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모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손 모라구에스 농장은 마요르카 북서부 트라문타나(Tramuntana) 산맥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한데요. 농장은 발데모사 마을 외곽 해발 고지에 자리한 400헥타르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에 올리브 과수원, 과수밭, 천연림 등이 펼쳐져 있습니다. 특히 약 80헥타르 규모의 계단식 밭에는 고대 올리브나무 10,0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들 중 일부는 수령 700년 이상으로 추정될 정도로 유서가 깊은데요. 이러한 계단식 올리브 밭과 더불어 산속 담수 저장 탱크와 산책로 등 전통적인 경관 요소가 농장 곳곳에 남아 있는데, 손모 프로젝트를 통해 이러한 역사적 경관도 함께 복원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 농장은 19세기에는 오스트리아 대공 루이스 살바도르(Luis Salvador)의 별장으로도 쓰였던 곳으로, 산 중턱에 그가 이용하던 전망용 산장(Refugio)이 남아 있어 생활문화사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한데요. 그렇기 때문에 손모는 단순한 보존 사업이 아니라 농업-공예-관광이 결합된 복합적인 재생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 모라게스의 농장 풍경 ⓒSonmo

약 15년간 단계적으로 추진되는 손모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크게 4개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1. 유기농 올리브 재배 및 생산
    농장의 주력 생산품은 유기농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로, 전통적인 마요르끼나(Mallorquina) 품종만을 사용해 연간 약 12,000리터의 올리브유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손 모라게스는 마요르카 고유 품종으로만 100% 생산되는 유일한 올리브유인데요. 이밖에도 농장 내 과수원과 채소밭에서 재배한 유기농 농산물로 수제 잼, 마멀레이드, 피클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2. 전통 수공예 품목 개발
    농장에서 얻은 자원으로 수공예 제품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농장에 자생하는 양떼에서 채취한 양털을 과거 마요르카 섬의 전통 기법을 되살려 담요와 러그 등 직조 섬유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요. 이를 위해 1960년대 이후 방치되었던 마요르카의 구식 방직기들을 인수하여 영국의 직조 장인 다니엘 해리스(Daniel Harris)런던 클로스 컴퍼니(London Cloth Company)와의 협업을 통해 현대적인 방식으로 복원했습니다. 복원된 19세기 직조기계를 활용해 2023년부터는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마요르카산 양모 담요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2024년에는 전통 문양을 살린 직조 러그와 직물 컬렉션도 선보였는데요. 또한 농장 내 흙, 돌, 식물의 재를 활용한 공방을 운영하면서 식기, 장식품 등의 세라믹 제품을 제작합니다. 특히 올리브 나무를 비롯한 지역 목재의 재를 유약으로 사용해 개발한 제품들이 인상적인데요. 손 모라게스의 토질과 올리브 씨앗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색감과 질감이 특징입니다.
  3. 체험 관광 및 교육 프로그램 
    단순히 제품 생산에 그치지 않고 농장의 체험 관광을 통해 전통과 가치를 공유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땅과 일, 트라문타나에서의 삶의 방식을 사람들과 나눈다’는 컨셉으로 올리브유 테이스팅 워크숍, 올리브 숲 속 피크닉, 농장의 역사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해설 프로그램, 산악 하이킹과 루이스 살바도르의 산장(Refugio) 투어 및 시식 이벤트 등 다양한 농장 체험 상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4. 판매 및 브랜드 운영
    손모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발데모사 마을의 작은 상점과 마요르카 수도 팔마(Palma) 도심에 있는 직영 오프라인 매장,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판매되고 있습니다. 올리브유는 300년 전통의 마요르카 유리 공방 고르디올라(Gordiola)가 직접 손으로 불어서 만드는 아름다운 유리병에 담겨 판매되고, 손모의 공예품들은 한정판 컬렉션 형식으로 소개되어 특히 수집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농장에서 나오는 상품 판매 수익을 통해 재생 및 복원 프로젝트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함과 동시에, 마요르카의 장인 정신과 슬로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독자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올리브 숲 속 피크닉 프로그램 ⓒSasha Personick
농장 투어 프로그램 ⓒSasha Personick
손모의 도자기 공방 ⓒSasha Personick

손모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의 기술과 철학을 바탕으로 협업하고 있습니다. 먼저 손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한 주역은 역시 브루노 엔트레카날레스(Bruno Entrecanales)입니다. 그는 스페인 기업 악시오나(Acciona) 가문의 일원으로 금융업으로 성공을 거둔 뒤 2007년 경 사재를 들여 손 모라구에스 농장을 인수했는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리조트를 개발하는 대신에 역사적인 농장을 되살리는 데 자신의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브루노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주도한 창립자로서, ‘과거의 삶의 방식과 전통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럭셔리’라는 신념을 갖고 손모를 시작했는데요. 그는 마요르카 ‘트라문타나 21(Tramuntana XXI)’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트라문타나 21은 지역의 환경 재생 및 지속가능 발전 계획 수립에 전문성을 제공하고 있는 손 모라구에스 프로젝트의 총괄 주관 단체로, 이를 통해 손모 프로젝트를 단순 개인 사업이 아니라 지역 전체의 지속가능성 운동으로 발전시켰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손모의 운영은 조 홀스(Joe Holles)가 핵심 인물로 참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발데모사에서 자란 조는 손 모라게스에 깊은 애정을 품고 프로젝트에 합류, 현재 혁신 및 지속가능성 디렉터(Director of Innovation & Sustainability) 겸 농장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데요. 그는 올리브 숲 복원과 전통 농업 재활성화의 청사진을 구체화하고, 다양한 제품 개발과 지속가능성 전략을 이끌어온 장본인입니다. 농업 엔지니어에서부터 환경과학자, 마케팅 전문가와 공방의 장인까지 다국적・다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젊고 열정적인 팀을 이끌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방치된 방직기의 부품 ⓒSonmo
방직기의 복원 과정 ⓒSonmo
복원된 방직기로 생산하는 울 제품 ⓒSonmo
손모에서 생산되는 흙과 올리브 나무의 재를 섞어 만든 유약 테스트 ⓒSonmo
손모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제품 ⓒSonmo

공예품의 제조에는 영국의 방직 전문가 다니엘 해리스(Daniel Harris)가 특별한 파트너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런던 클로스 컴퍼니(London Cloth Company)를 운영하며 빅토리아 시대 방직기를 복원해온 장인이자 섬유 역사 연구자입니다. 손모는 그와의 협업을 통해, 방치되었던 마요르카 섬의 구식 직조기 6대를 복원하고, 옛 섬유 공장의 기술을 재현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손모의 텍스타일 부문 책임자인 클라라 비녈(Clara Vignal) 등 섬유 디자이너 팀을 이루어 전통 무늬 디자인과 천연염색 기법을 개발하고, 도자 부문에서는 현지의 세라믹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토속 재료 실험과 제품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지역 장인들과의 협업도 눈에 띄는데요. 현지 유리공방 고르디올라(Gordiola)와 함께 손모에서 생산되는 올리브유를 위한 수제 병을 전통 유리공예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유기농 농업 협회 APAEMA(Associació de Productors d’Agricultura Ecològica de Mallorca)와 환경 컨설팅사 트루월드(TrueWorld), 지속가능성 스타트업 아졸라 프로젝트(Azolla Projects)가 손모의 파트너로 참여하여 유기농 인증, 환경 모니터링, 환경 크레딧 체계 개발 등을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수의 현지 농업인, 장인, 전문가, 기관들이 힘을 합쳐 손모 프로젝트를 성장시켜왔으며, 현재도 100여 명의 장인과 기술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손모에서 재배되는 올리브 ⓒSonmo
손모의 로고 디자인 ⓒSonmo, StudioRoses

손모의 오프라인 매징이 있는 마요르카의 수도 팔마를 베이스로 하는 스튜디오 로지스(StudioRoses)가 디자인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흥미롭습니다. 마치 손 모라게스에서 재배되는 올리브처럼 보이는 점들이 손모(Sonmo)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그래픽 디자인입니다. 각 제품의 패키지로 확장되는 시스템도 인상적인데요. 손모는 2024년 FAD 아트디렉터 및 그래픽 디자이너 협회 (ADG-FAD) 가 수여하는 라우즈 어워즈(Laus Awards)의 그래픽 디자인 및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수상했습니다. 

손모 ⓒSasha Personick

오늘날 트라문타나 산맥의 많은 역사적 영지들은 호텔이나 별장으로 전환되며 관광산업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손모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상업적 개발 대신, 전통 농업의 복원과 생활 문화의 재현에 집중한 것인데요.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장이 아니라, 일종의 ‘유기농 박물관’으로 기능하는 셈입니다. 이를 통해 방문객들은 숙박이나 휴양을 소비하는 대신에 땅과 사람, 단순한 기술이 이어온 오래된 질서의 역사를 직접 경험합니다. 계단식 돌담 위에서 천천히 살아가는 올리브 나무, 재를 유약으로 바꾸는 도공의 실험, 수십 년간 멈춰 있던 직조기를 다시 돌려 얻은 직물은 모두 오래된 땅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가 됩니다. 

손모의 인스타그램에는 ‘Sonmo’의 앞글자를 딴 ‘Satisfaction Of Not Missing Out’ 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흔히 타인과 스스로를 비교해서 뒤쳐지거나 놓칠 것을 두려워하는 ‘FOMO(Fear Of Missing Out)’를 반대로 차용한 것인데요. 직역한다면 ‘무언가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얻는 만족’ 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일상에서의 의미도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재발견에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돌담, 나무, 흙, 그리고 매일의 햇살과 바람까지.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내던 풍경들이 사실은 삶을 지탱하는 본질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합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것들은 여전히 풍요롭고 새로운 의미를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주어진 것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전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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