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무언가에게 처음 이름을 지어준 순간을 떠올려보세요.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존재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매일 물을 주던 화분도 비슷해요. 이름 없이 그냥 ‘베란다 화분’이었을 때와,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뒤는 마음 가는 정도가 다르죠. 이름을 붙인다는 건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를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꾸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에는 동네의 토종 채소를 선보이는 ‘시부야 루꼴라(渋谷ルッコラ)’를 소개합니다.

시부야 루꼴라 ⓒUrban Farmers Club

‘시부야 루꼴라(渋谷ルッコラ)’는 도쿄 시부야강변의 한 텃밭에서 몇 해에 걸쳐 씨를 받고 다시 심기를 반복해 이 동네만의 채소로 자리 잡은 루꼴라에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은 오구라 다카시(小倉崇)입니다. 원래는 잡지와 책, 광고 편집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모든 걸 바꿔놨습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때 도쿄의 슈퍼에는 식료품도 물도 없었어요. 이대로 물류가 멈추면 도쿄에서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구할 수 없는 건가, 하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심각한 마음만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그저 순수하게 키우는 걸 즐겨보고 싶었습니다. 채소 기르기가 취미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그의 사무실은 시부야에 있었습니다. 공사 현장을 지날 때마다 아스팔트 밑에도 결국 흙이 있다는 걸 떠올리다가, 문득 옥상에 밭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대요. 2014년 ‘위켄드 파머스(weekend farmers)’를 시작했고, 2015년에는 시부야의 한 라이브하우스 옥상에 첫 밭을 만들었습니다. 2018년에는 이 활동을 특정비영리활동법인 어반 파머스 클럽(アーバンファーマーズクラブ, 이하 UFC)으로 정식 등록했고요. 오구라의 비전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미래를 우리 손으로 경작한다.”

 

시부야 스트림과 시부야 브릿지 사이에 있는 시부야 루꼴라 재배공간 ⓒMo:take Magazine, Urban Farmers Club

시부야 루꼴라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2020년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오구라는 시부야강변에 만든 ‘리버 스트리트 팜’에서 루꼴라를 계속 키우고 씨를 받으며, 이걸 이 땅만의 고유한 품종으로 만들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채소 세계에는 같은 땅에서 3대에 걸쳐 씨를 받아 다시 심으면 ‘고정종(固定種)’이라 부르는 관습이 있는데요. 일본의 유명한 ‘네리마 무’처럼, 지역 이름이 붙은 채소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구라는 이 개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처럼 농업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고정종을 이어갈 수 있어요.”

전문 농가는 균일한 품질과 대량 생산에 집중해야 하지만, 시민들은 그저 즐거움으로 매년 씨를 받고 다시 심는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도 이 루꼴라는 참기름과 비슷한 향이 특징이라고 오구라는 말하고, 꽃도 먹을 수 있어서 은은한 단맛과 꿀 향이 난다고 해요. 2024년 9월, UFC는 이 오랜 자가채종 활동을 정식으로 ‘시부야 루꼴라 프로젝트(渋谷ルッコラ・プロジェクト)’라는 이름으로 묶어 새롭게 시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니버스 커피와 협업한 커피 찌꺼기 퇴비 ⓒOnibus Coffee

이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는 루꼴라 하나만 잘 키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고, 도시의 자투리 공간에서 기르고, 동네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로 흙을 채우고, 다 자라면 먹고, 꽃이 피면 다시 씨를 받는 순환 전체를 시민이 직접 반복하도록 만든 거예요. 이 흙 만들기를 함께하는 파트너가 로컬푸드사이클링 주식회사(ローカルフードサイクリング, 이하 LFC)입니다. LFC 대표 다이라 유이코(たいら由以子)는 가정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전용 가방형 퇴비함에 모아 발효시키는 방식을 만든 사람이에요. UFC는 이 커뮤니티 퇴비함으로 만든 흙을 리버 스트리트 팜의 루꼴라 밭에 그대로 씁니다. 다이라는 이 방식의 철학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비싸지 않아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협력하면 시스템을 만들 수 있어요.”

플랜터를 만드는 목재도 도쿄 기바 지역 목공소에서 나온 폐자재를 회원들이 직접 손질해 썼고, 근처 카페 오니버스 커피(ONIBUS COFFEE)에서 매일 나오는 커피 찌꺼기도 퇴비 재료로 받아 씁니다. 오니버스 커피는 2012년 도쿄 오쿠사와에서 시작해 지금은 나카메구로와 시부야를 포함해 국내외 여러 지점을 운영하는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리예요. “씨앗에서 컵까지(From Seed to Cup)”를 내걸고 산지 농가를 직접 찾아다니는 곳으로, 지역에 뿌리내린 커피 문화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시부야 루꼴라와 결이 잘 맞는 이웃이기도 합니다.

후레아이 식물센터 ⓒSolso

시부야 루꼴라 프로젝트는 오구라와 UFC 이사 호리에 에미코(堀江絵美子), 이 두 사람이 오랫동안 사실상 조직을 이끌어왔습니다. UFC는 시부야와 하라주쿠, 에비스 여러 농장에 800명이 넘는 자원봉사 회원을 두고 있는데, 정식 상근 직원을 처음 고용한 건 2023년 7월, 시부야구의 공공시설 ‘후레아이 식물센터(ふれあい植物センター, Shibuya City Botanical Garden Fureai)’ 운영을 맡으면서였어요. 호리에는 이 활동이 지향하는 네 가지 축을 이렇게 말합니다.

“지역활성화, 식육, 환경대책, 식량자급.”

후레아이 식물센터는 낡은 시설을 리뉴얼하면서 시부야구가 ‘시부야판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그 지역에서 소비한다)‘와 지역 커뮤니티 형성을 명확한 목표로 내걸고, UFC를 운영 주체로 선정한 곳입니다. 그저 구경하는 식물원이 아니라 수경재배실과 텃밭, 카페, 상점, 라이브러리를 한데 묶어 시민이 재배부터 퇴비화까지 직접 경험하게 만든 공간이에요. 이 공간의 건축 리뉴얼은 건축사무소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Suppose Design Office)가 맡았습니다. 씨앗과 흙, 작은 화분을 함께 담은 파종 세트가 1,000엔에 팔리고, 워크숍 자체는 대부분 무료로 열어 참여 문턱을 낮췄습니다. 2025년에는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에서 열린 ‘시부야 순환 카페’ 행사에서 시부야 루꼴라 샌드위치가 780엔에 한정 판매되기도 했고요. 

시부야 루꼴라를 사용한 샌드위치 ⓒLFC

2025년 11월, 시부야 루꼴라는 처음으로 도쿄를 벗어났습니다. 후쿠오카 텐진 지역에서 LFC와 NPO법인 순환생활연구소(循環生活研究所)가 함께 벌이던 ‘텐진 LFC(天神 Local Food Cycling)’ 프로젝트가 시부야 루꼴라의 씨앗을 넘겨받아 ‘텐진 루꼴라’로 다시 키우기 시작한 거예요. 파타고니아 후쿠오카 매장에서 열린 킥오프 행사에는 오구라와 다이라가 함께 나와 도시의 순환과 종자의 미래를 이야기했고, 2026년 3월에는 하카타의 호텔 그레이트 모닝(HOTEL GREAT MORNING)에서 다시 파종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호텔은 스스로를 ‘소재에 집중하는 도심 속 힐링 호텔’이라 소개하며 자연 에너지와 식자재 순환을 중요하게 내세우는 곳이라, 씨앗을 새로 심는 행사를 열기에 잘 어울리는 장소였어요.

텐진 LFC ⓒLFC

시부야 루꼴라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 동네에 원래 특산물이랄 게 딱히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시부야는 논밭도, 오래된 재래 품종도 없는 초고밀도 상업지구예요. 이 프로젝트가 지역의 자원으로 삼은 건 땅이 아니라 옥상과 공공시설, 음식물 쓰레기, 폐목재,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성이라는 게 원래 그 땅에 있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에요. 루꼴라라는 채소 자체가 애초에 일본 토착종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이 채소를 ‘시부야의 것’으로 만든 건 생물학적 원산지가 아니라, 몇 년째 같은 자리에서 씨를 받아온 사람들의 반복된 노동, 그리고 그 채소에 ‘시부야’라는 이름을 붙이고 불러온 시간이었으니까요.

이 프로젝트가 후쿠오카로 건너가는 방식도 같은 원리를 따릅니다. 잘 만든 브랜드 하나를 여러 도시에 그대로 복제하는 대신에 각 지역이 스스로 씨를 받아 자기 동네의 이름을 붙이도록 열어둔 거예요. 이건 흔히 말하는 인구감소 지방의 특산품 개발과는 결이 다릅니다. 오히려 완전히 다른 도시로 옮겨가서도 똑같이 통하는 지역순환의 방법론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도겐자카의 러브 호텔 거리 옥상에서 펼쳐진 첫 행사 ⓒMo:take Magazine, Urban Farmers Club

시부야 루꼴라는 지역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하나의 방법론으로 만들어냈어요. 땅도 전통도 특산물도 없던 동네에서 ‘이 동네다움이란 이런 것’이라는 정의를 먼저 세우고, 씨앗을 심고 퇴비를 만들고 이름을 붙이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그 정의를 실제로 증명해 보인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진 지역의 정당성과 이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이자 상품이 됐습니다.

이 브랜드가 파는 건 결국 ‘시부야’라는 이름 이 아닌 것 같아요. 흙을 함께 만드는 사람들, 부산물을 나눠주는 이웃 카페, 같은 방법론에 공감해 씨앗을 이어받은 다른 동네의 사람들까지, 같은 비전을 향해 저마다의 역할을 맡은 사람과 조직을 하나씩 끌어모았습니다. 결국 이들이 만들어낸 건 채소 품종이 아니라 같은 지향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자원을 주고받는 작은 경제 생태계가 아닐까요. 지역의 이름을 판다는 건 그 이름 하나를 상품으로 파는 일이 아니라 그 이름이 상징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계속 새로 불러 모으는 일이라는 것. 이게 아마 시부야 루꼴라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겁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어떤 이름과 이야기가 만들어질까요?

글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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