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 시작과 끝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농경사회에서는 성별에 따라 동네의 범위를 다르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나 말이 쉽게 오갈 수 없는 산이나 강처럼, 물리적인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을의 경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일상의 반경이 넓었던 남자는 주거지 바깥의 농경지와 산의 어귀까지를 마을로 인지했습니다. 지금은 성별이 아니라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동네라고 인식하는 공간의 범위가 달라질 겁니다. 결국 동네의 경계에 대한 인식은 거주자들의 생활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동네의 경계에 위치한 동네의 입구는 지역의 얼굴이자, 문화를 반영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해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나무, 마을의 안녕을 비는 장승이나 솟대, 이웃들이 오며가며 안부를 묻는 정자가 만들어내는 공간이 마을의 입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말을 대신할 이동수단, 특히 대중교통이 동네 구석구석까지 연결되면서 역(Station)이 동네의 현관이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어떤 장소를 가기로 하면, 자연스럽게 그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서 만날 약속을 정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개성이 강한 동네의 역은 지역의 문화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개찰구를 힐끗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홍대입구역, 옛 터전의 모습을 간직한 광장이 펼쳐지는 동대문역사공원역, 오며가며 간단한 생필품이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매장으로 가득한 강남역까지. 때로는 지하철 출구 앞의 카페나 광장이 그런 역할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에는 동네의 첫인상을 만드는 역이라는 공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소 엔크로스를 소개합니다.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JR노선이 지나가는 노베오카 역 주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엔크로스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탄생했습니다. 역과 동네의 새로운 관계를 구상하기 위해, 실제로 이 장소를 매일 이용하게 될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워크숍을 1년간 진행했습니다. 커뮤니티 디자이너 Studio-L에서 맡은 워크숍을 통해 이 장소가 담아야 할 용도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된 것입니다. 시민들이 직접 구상 단계에서 참여하는 것의 의미는 어떤 명분을 넘어 함께 동네를 만든다는 공동의 감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결론은 ‘새롭고 자유로운 마을’이라는 기치아래, 시민들이 언제든지 방문해서 크고 작은 활동을 할 수 있고, 그런 활동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발신할 수 있으면서도, 오랜 시간동안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획의 방향성은 직관적인 격자 형태의 건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넓은 스펙트럼의 커뮤니티부터, 계속해서 변화할 미래의 지역의 상까지 담을 수 있는 단순한 격자 구조를 기반으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동네의 거리로 확장될 수 있도록 투명하고 열린 공간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교류가 자유롭게 일어나는 장,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교차하는 장소라는 뜻의 ‘엔크로스(Encross)’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엔크로스 ⓒ Tecture Magazine

엔크로스의 운영은 CCC가 맡았습니다. 다이칸야마 T사이트를 기점으로, 책을 위시한 문화를 매개로 다양한 지역에 있는 공공시설과 도서관, 상업시설을 도맡아 운영하고 있는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ulture Convenience Club)의 감도와 노하우가 엔크로스에서도 발현되고 있습니다. CCC는 여전히, 소위 민-관 협력 체제의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어인 것 같습니다.

CCC는 엔크로스를 관통하는 ‘새롭고 자유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운영의 가이드라인을 세웠습니다.

• 365일 연중 무휴,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언제든지 열려 있는 공공 시설

• 동네에서 가장 큰 서점과 카페가 있는 곳

• 이용하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아늑한 거처가 있는 곳

• 다양한 이벤트가 날마다 행해지고 있는,
  언제라도 뭔가 하고 있는 곳

• 시민 활동을 열린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시민이 발표하는 장소

• 아이와 여성에게 친화적인 시설

• 동네의 정보 발신 스테이션이 되는 곳

• 지역의 좋은 것을 꾸준히 엄선해 전달하는 곳

•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역의 대합실

엔크로스 ⓒ Culture Convenience Club

이상의 9가지로 엔크로스가 지역에서 해야 할 역할을 설정하고, CCC의 오리지널인 츠타야와 스타벅스를 중심으로 벽이 없이 완전히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점의 책장 사이사이에는 열차 시간표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디스플레이가 있어 짬을 내서 슥슥 책을 읽을 수도, 산책하다가 들러 어린이 전용 공간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로컬 브랜드들의 워크샵이 열리기도 하는 장소입니다. 어쩌면 지역 발전을 위한 정책 토론회나, 비상시에는 진료소가 될 수도, 지역 축제의 무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어쩌면 피상적일 수도 있지만 엔크로스에 얽힌 이야기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리고 실제로 그동안 엔크로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활동들 안에서 진정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느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동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엔크로스는 그야말로 동네의 얼굴이자 일상적인 생활 공간이며, 어쩌면 동네의 자부심과 가능성의 꿈을 심어주는 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간이 반드시 공공 시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동네의 카페나 소매점이 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유의미한 지점은 더 나은 동네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장소를, 로컬 브랜드와 지자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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