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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없는 장소에서

장소 없는 장소에서

우리는 늘 어딘가에 간다고 말하지만, 막상 떠올려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그곳의 공기와 빛, 그리고 잠깐 스쳤던 감정들입니다. 돌아와 보면 설명할 수 있는 건 사진이 아니라 풍경과 관계맺는 감각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여행은 방의 크기보다 바람의 온도로 기억되고, 장소는 물리적인 경계가 아니라 관계의 밀도로 느껴지곤 합니다.

어쩌면 머문다는 일은 공간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장소에 머무는 걸까요, 아니면 장소가 우리에게 머무는 걸까요?

이번주에는 새로운 형태의 호텔을 선보이는 ‘제로 부동산(Zero Real Estate)’를 소개합니다.

 
 
제로 리얼 에스테이트 ⓒCaterina Rancho

제로 부동산(Zero Real Estate)은 스위스의 쌍둥이 개념미술가 프랑크 릭린(Frank Riklin)파트릭 릭린(Patrik Riklin) 형제, 그리고 호텔 전문가 다니엘 샤르보니에(Daniel Charbonnier)가 공동 기획한 독특한 호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릭린 형제가 2008년 선보인 설치미술 작품 ‘널 슈턴 호텔(Null Stern Hotel)’에서 출발했는데요. ‘널 슈턴’은 독일어로 ‘0성급 호텔(Zero Star Hotel)’이라는 뜻으로, 형제는 호텔의 등급 제도를 풍자하기 위해 지하 핵방공호를 호텔로 개조했습니다. 전통적인 호텔 등급을 결정하는 대리석 바닥, 금박 수전, 넓은 로비와 같은 물리적 자산을 모두 제거해 ‘제로’로 만들었고, 대신 투숙객의 감정과 경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극대화하고자 했는데요. 

2009년 스위스에서 단 1년동안 운영된 이 호텔은 창문도 없고 환기도 원활하지 않은 콘크리트 벙커 안에 만들어졌습니다. 투숙객들은 공동 샤워실을 이용했고, 난방이 되지 않는 공간에서 잠을 자야 했죠. 아침 온수는 단 한 명분만 제공되어 추첨으로 순서를 정해야 했고, 침대 배정은 낡은 자전거 바퀴를 돌려 결정되었습니다. 취침 시간마저 투숙객들의 평균 희망 수면 시간을 계산해 정했죠. 일상 속의 예술을 표방한 사회 실험이었지만, 이 열악한 환경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불황에 친숙한 사치(Recession-friendly Luxury)’로 해석되며 미디어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2009년 전 세계 호스피탈리티 산업 혁신상 후보에 오르고, GEO 선정 유럽 100대 호텔에 이름을 올리면서 호텔 업계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널 슈턴 호텔 ⓒKünstlersohn

포시즌스(Four Seasons)를 거쳐 글로벌 호텔 컨설팅 기업 마인즈 인 모션(Minds in Motion)의 대표를 지낸 다니엘 샤르보니에(Daniel Charbonnier)는 이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감명을 받아 프로젝트에 합류했습니다. 2018년, 널 스턴 호텔 프로젝트는 지하 방공호를 벗어나 스위스 동부 알프스에서 ‘제로 부동산(Zero Real Estate)’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합니다. ‘부동산이 없는(Real Estate-liberated)’ 호텔이라는 개념 아래, 벽과 지붕을 완전히 제거하고 들판 위에 침대만을 놓는 극단적인 형태를 선보이며 전통적인 호텔의 정의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요. 실제로 이 호텔에는 물리적 벽이나 천장이 없고, 침대와 협탁, 스탠드 조명 등 필수 요소만 갖춘 최소한의 공간만 제공됩니다. 이를 통해 투숙객은 자신을 둘러싼 광활한 알프스의 풍광을 객실의 인테리어이자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경험하게 되죠. 공동창립자 샤르보니에는 ‘호텔에 별점을 매기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별을 받는 주체는 호텔이 아니라 고객 자신’이라며, 제로 부동산은 ‘손님을 중심에 놓는 진정한 럭셔리 호텔’이라고 설명합니다.

지역 주민들이 버틀러가 된다 ⓒAtelier für Sonderaufgaben
지역 주민들이 버틀러가 된다 ⓒCaterina Rancho

제로 부동산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호텔과 달리 팝업 호텔 형태로 운영됩니다. 각 객실은 일종의 노천 스위트룸으로, 주로 여름 성수기에만 한시적으로 개설되며, 건물이 없기 때문에 체크인은 인근 관광안내소나 지역 목장에서 진행되는데요. 이 가격에는 개인 버틀러 서비스와 지역 특산품으로 구성된 조식이 포함되어 있어, 투숙객은 야외에서 머물면서도 호텔 수준의 맞춤형 서비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지역 관광청,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운영 방식이에요. 기획자들은 스위스 각 지역의 관광 조직과 협력해 최적의 장소를 발굴하고 객실을 설치합니다. 이를 통해 지역별 특색을 담은 현지에 딱 맞는 제로 부동산이 탄생하죠. 예를 들어 2018년 처음 선보인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역의 객실 3곳은 토겐부르크 관광청이 주도해 기획·운영되었고, 2020년에는 스위스 동부 6개 주와 리히텐슈타인까지 동참해 총 7개의 객실을 분산 운영했습니다.

각 객실에는 해당 지역 출신의 ‘현대판 버틀러’가 배치되어 손님맞이부터 지역 안내, 식사 서비스까지 책임집니다. 버틀러로 선발된 주민들은 사전 교육을 통해 강풍 속 침대를 정돈하거나, 쟁반을 들고 계곡을 건너는 법까지 훈련받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하는데요. 이러한 사업 구조 덕분에 고정 건물 유지비 없이도 수익을 창출하고, 대신에 발생한 수익은 동네 주민을 버틀러로 고용하는 비용과 지역 서비스 구매 등 지역사회에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독특한 컨셉과 입소문으로 예약 경쟁률이 매우 높아 일부 지역의 경우 개장 직후 하루만에 해당 시즌 모든 객실이 매진되었고, 한때 대기자만 9,000명에 달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기존 호텔과 차별화된 제로 부동산의 운영 전략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위스 국가 관광청은 제로 부동산 열풍 이후 전국 50여 곳에 ‘밀리언 스타 호텔(Million Stars Hotel)’이라는 유사한 오픈에어 숙소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했죠. 

자연을 생중계하는 TV가 있는 제로 부동산 ⓒCaterina Rancho
제로 부동산에서 바라보는 풍경 ⓒNordwand AG, Silvan Widmer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호텔리어이자 예술가가 되어가는 과정에 보람을 느껴요. 궁극적으로는 세계 각지의 특별한 장소들이 부동산 없는 호텔로 연결되어 새로운 여행 지도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릭린 형제의 이러한 비전은 제로 부동산의 정신이 럭셔리로 소비되는 대자연과 호텔이라는 이름을 벗어나서, 다른 담론과 주제, 장소적인 맥락으로 얼마든지 상상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022년, 리클린 형제와 샤르보니에가 스위스 발레(Valais)주의 사이용(Saillon) 지역에서 선보인 ‘안티 아이딜릭(Anti-idyllic) 스위트’는 이러한 점에서 곱씹어볼 가치가 있어요. 이전까지의 제로 부동산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다면, 이 새로운 스위트는 의도적으로 소음과 공해, 그리고 시각적 불편함이 가득한 주유소 앞에 설치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 전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재, 지금은 편안하게 잠들 때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편하게 잠들게 하는 호텔’이 아니라 ‘불편하게 깨어 있게 하는 호텔’이라는 전위적인 컨셉으로 만들었어요. 투숙객은 맑은 공기 대신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셔야 하며, 적막 대신 도로의 소음과 엔진 소리를 들어야 하죠. 또한 옆에 서 있는 가격 전광판에는 끊임없이 변동하는 연료비가 표시되어 현대 경제의 불안정성을 직시하게 만드는 불편한 호텔인 셈입니다. 

주유소 앞 호텔 ⓒAtelier für Sonderaufgaben

이미 어두컴컴한 지하 벙커를 지나, 눈부신 대자연과 시끄럽고 냄새나는 주유소 옆까지 확장된 ‘장소 없는 장소’, ‘부동산 없는 부동산’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이미 캠핑과 러닝, 등산과 낚시 같은 레저의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구 궤도를 돌며 즐기는 파인 다이닝이나, 전자기기 없이 몇 주를 보내는 디지털 디톡스 명상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죠. 동시에 AI가 촉발한 효율과 자동화의 시대 속에서, 단 하루, 단 한 순간에만 붙잡을 수 있는 오프라인 경험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릭린 형제가 호텔의 본질이라 여겨지던 자산과 장치의 층위를 모두 없애버렸을 때, 결국 남은 것은 두려움을 느낄 만큼 한복판에 놓인 감정과 경험뿐이었죠.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인상적인데요.

도대체 우리가 진짜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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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라는 언어

구름이라는 언어

어떤 곳을 여행할 때, 우리는 그곳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이상하게 마음이 통하는 순간들을 경험하곤 합니다. 메뉴판을 읽지 못해도 맛으로 기억되는 음식이, 제목을 몰라도 감정이 먼저 닿는 음악이, 배경을 알지 못해도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이 있죠. 말과 문자보다는 느리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 언어는 대개 그 지역에 오래 머물며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기후와 풍경, 사람들이 반복해온 삶의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표정이나 몸짓, 춤과 소리 같은 것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무언가를 이해하기보다 먼저 ‘느끼게’ 되곤 하죠. 흥미로운 건 이런 언어들은 아주 고유한 조건에서 태어나지만 동시에 놀라울 만큼 보편적이라는 점이에요. 낯선 곳에서 갑자기 마음이 열리는 순간은 언제나 이런 감각을 마주할 때 찾아옵니다. 어쩌면 우리의 주변에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언어가 있는 건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구름이라는 언어로 지역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구름 감상 협회(The Cloud Appreciation Society, CAS)’를 소개합니다.

구름감상협회의 창업자 개빈 ⓒPeople & Company, Medium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로 번역되기도 하는 구름 감상 협회(The Cloud Appreciation Society)는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개빈 프레토르-피니(Gavin Pretor-Pinney)가 2005년에 설립한 국제단체입니다. 그는 1990년대에 잡지 아이들러(The Idler)의 공동창립자이자 열성적인 구름 애호가이기도 한데요. 친구의 부탁으로 2004년 콘월(Cornwall)에서 열린 한 문학 페스티벌에서 구름을 주제로 가벼운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의 제목이 「구름 감상 협회의 창립 기념 강연」이었죠. 처음에는 농담처럼 붙인 이름이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많은 청중들이 이 가상의 클럽에 실제로 가입하고 싶어 했다고 해요. 그 반응에 힘입어 웹사이트를 만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협회가 된거죠. 구름 감상 협회는 120개국에서 6만 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글로벌 커뮤니티로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구름을 바라보고, 찍고, 기록하는 걸까요? 창립자 개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 우리는 점점 더 분열되고, 양극화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의 일부인 구름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줘요. 이 단체가 의미 있는 이유는 늘 곁에 있으면서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무언가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미국 워싱턴주 레이니어산의 렌즈 구름 ⓒRyan Verwest

구름 감상 협회는 설립 초기부터 자선 단체가 아닌, 자립 가능한 비즈니스로 운영되기를 선택했어요. 보조금이나 기부금을 쫓는 구조가 사람들을 하늘의 아름다움으로 연결하려는 본래의 미션을 흐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유료 멤버십을 기반으로 구름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상 속에서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다양한 서비스와 제품을 차근차근 만들어 왔어요. 이러한 생각은 협회의 모든 프로젝트에 일관된 방향성을 만들어냅니다.

구름 감상 협회의 서비스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듬뿍 느껴져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각자의 생활 반경 안에서 구름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응원하고,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같은 하늘, 다른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사람들과 그 감각을 공유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협회의 가장 오래되고 핵심적인 기능인 구름 사진 갤러리(Cloud Photo Gallery)는 그런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에요. 웹사이트에 축적된 아카이브에는 세계 각지에서 촬영된 구름 사진들이 모여 있고, 매달 한 장의 ‘이달의 구름’을 선정해 소개합니다. 여기에 구름을 그린 그림만 모은 ‘Cloud Art’, 구름의 흐름과 변화를 담은 영상 아카이브 ‘Cloud Videos’, 구름에 대한 시를 모은 ‘Cloud Poetry’, 구름을 보며 듣기 좋은 음악을 큐레이션한 ‘Cloud Music’까지. 하나의 갤러리가 구름을 바라보는 다양한 감각과 해석으로 확장되어 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에요. 회원을 위한 뉴스레터 서비스 ‘Cloud-a-Day’는 하루에 하나의 구름을 보내는 아주 단순한 형식의 서비스인데요. 이렇게 축적된 구름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다시 매일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전달됩니다.  

구름 기억 지도 ⓒThe Cloud Appreciation Society
초보 구름 관찰자들을 위한 가이드북 ⓒThe Cloud Appreciation Society

구름 기억 지도(Memory Cloud Atlas)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어요. 매년 9월 둘째 주 금요일을 ‘구름 감상의 날(Cloud Appreciation Day)’로 정해서 하루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이 각자의 하늘 사진을 공유하고, 그 사진들을을 모아서 온라인 지도 형태로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국가의 경계가 아니라 구름의 모양과 그날의 하늘로 구성된, 일종의 ‘세계 구름 지도’인 셈이죠.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정치적 지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한편 클라우드 스파터(CloudSpotter)는 AI 기반으로 구름을 인식하는 스마트폰 앱으로, 구름 관찰을 놀이처럼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어요. 구름 감상의 날 알림 기능과 Cloud-a-Day 콘텐츠를 포함해서 더 많은 소셜 기능이 지속적으로 추가될 예정입니다. 이를 두고 개빈은 ‘구름을 위한 틴더’라고 농담하기도 했죠.

이외에도 구름 감상을 대중에게 확장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The CloudSpotter’s Guide’는 구름 감상의 예술과 과학을 대중에게 소개한 베스트셀러였고, 이후 BBC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어요. ‘The Cloud Collector’s Handbook’는 구름을 ‘수집’하듯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든 휴대용 가이드로, 많은 회원들에게 ‘구름 애호가들의 성경’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Clouds That Look Like Things’는 전 세계 회원들이 촬영한 사진을 엮어, 구름을 둘러싼 유머와 상상력을 보여주었고요. 여기에 더해, 학교와 홈스쿨링 교육자를 위한 수업 자료로 구성된 Cloud Appreciation Pack처럼 교육 서비스도 함께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적·문화적 시도들은 전통적인 커뮤니티가 주는 공동체적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물리적으로 떨어진 세계 곳곳의 지역들을 동시에 연결하려는 구름 감상 협회의 운영 전략을 잘 보여줍니다.

오크니 섬에서 열린 스카이 개더링 ⓒThe Cloud Appreciation Society

구름 감상 협회는 글로벌 커뮤니티이지만 문화와 교육, 커뮤니티 형성 활동을 통해 지역과 로컬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영향을 만들어 왔습니다. 협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각자의 ‘지역 하늘(local sky)’에 대한 감상을 매개로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이에요. 단순히 구름 취향을 온라인에서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실제로 구름을 보기 위해 이동하고 머무는 새로운 형태의 관광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협회는 ‘스카이 개더링(Sky Gathering)’‘스카이 홀리데이(Sky Holiday)’라는 이름의 단체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는 구름과 하늘이 특별한 장소를 회원들과 함께 찾아가는 방식이에요. 대표적인 사례가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에서 열린 스카이 개더링입니다. 2024년과 2025년에 진행된 프로그램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2026년 5월에는 5일간의 오크니 스카이 개더링(Orkney Sky Gathering)이 다시 예정되었어요. 이 일정에는 구름 관찰뿐 아니라 신석기 시대 유적 탐방, 해양 역사 이야기, 섬의 민속 문화 체험, 지역 음식과 위스키 시음까지 포함됩니다. 특히 구름 감상 협회는 이 여행을 오크니에 거주하는 사진작가이자 협회의 회원과 함께 기획해서, 방문객들이 단순히 관광객이 아니라 지역에 숨겨진 명소까지 경험할 수 있도록 계획했어요.

룬디 섬에서 열린 또 다른 스카이 개더링에 참여했던, 맨해튼에서 일하는 한 변호사는 몇 년간 회원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와 멀리까지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를 로이터(Reuter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타겟에 가서 종이 타월을 사야지’라든지, ‘아이들은 학원에 가야 해’ 같은 해야 할 일들에 쫓기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마지막으로 아무 생각 없이 구름을 바라보며 음악을 연주했던 게 언제였지?’라는 질문이 떠올라요. 그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죠.

여긴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기억을 되찾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2026년에는 볼리비아 스카이 홀리데이(Sky Holiday)가 열릴 예정이에요. 이 여행은 우유니 소금사막의 얕은 물 위에 비치는 구름의 반사 풍경과, 고지대에서 바라보는 맑은 밤하늘을 중심으로 구성돼요. 일정에는 라파스와 티티카카 호수, 우유니 방문이 포함되고, 현지 가이드와 숙소, 소금 호텔과 문화 유적 방문을 통해 지역 관광 산업을 직접적으로 지원합니다. 볼리비아 천문학자와 함께하는 별 관측, 티와나쿠 유적 탐방은 하늘 감상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고요. 참가자 수는 약 18명으로 제한해서 깊이 있는 경험과 최소한의 환경 영향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체험 기반 로컬리즘(Experiential Localism)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어요. 방문객과 지역 주민이 자연환경을 매개로 깊이 연결되고, 지역 가이드와 예술가, 음악가들이 직접 참여해 전통 춤을 가르치거나 자연 산책을 안내합니다. 이는 단순한 관광 상품을 넘어서, 구름이라는 취향으로 지역을 경험하게 함으로서, 일회성의 관광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역 경제와 문화에 실제로 기여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됩니다. 지자체 입장에서도 이런 행사는 비수기 방문객을 유치하고, 그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니까요. 

협회 회원이 개발한 캔 모양의 태양 카메라 '솔라캔' ⓒThe Cloud Appreciation Society
솔라캔으로 촬영한 하늘 사진 ⓒSam Cornwell

구름 감상 협회에서 판매하고 있는 제품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솔라캔(Solarcan)이에요. 협회의 회원(회원 번호 16,804번)인 사진작가 샘 콘웰(Sam Cornwell)이 직접 설계한 초소형 태양 카메라인데, 태양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궤적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기록합니다. 사용 방법은 놀랄 만큼 단순해요. 태양을 향하는 튼튼한 기둥이나 창가에 올려두기만 하면 됩니다. 계절이 바뀌며 태양의 고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그 변화는 캔 안의 필름 위에 고스란히 쌓여요. 그 사이를 지나가는 구름들이 태양의 흔적을 끊어서 마치 기상학적인 모스 부호처럼 신비한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솔라캔은 몇 주, 몇 달, 때로는 한 계절 내내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 인내심만 있다면, 시간이 지나 아주 아름다운 이미지가 남거든요.

이 제품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기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애정, 그리고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사랑과 헌신 같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매일 마주하는 하늘과 구름, 태양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구름 감상 협회의 이야기를 읽으며 떠올랐던 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쉽게 지나치고,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어쩐지 쑥스러운 ‘구름’이라는 존재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며 지루할 틈이 없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드러나는 고유함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것. 그래서 구름이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꼭 구름만 언어가 될 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커피와 음악, 가구와 책, 누군가의 진심과 취향 역시 각자의 언어가 될 수 있겠죠. 말보다 느리지만, 그래서 더 멀리 닿는 언어들 말이에요. 

자, 여러분의 언어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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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요즘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다 보면 사회나 미래, 대의나 집단 같은 말들은 쉽게 공허해지고 당장 눈앞의 일과 개인의 영리 바깥을 상상하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렇게 일상을 살다 보면 문득 허무하거나 이유 없는 우울감에 잠길 때도 있죠. 그럴 때마다 저마다 빠져나오는 방법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경기장에 가서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전시장의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인류애 같은 감정이 슬며시 되살아나곤 합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순간에는 막연한 기대나 희망, 혹은 무언가를 다시 해보고 싶다는 용기가 불쑥 고개를 들곤 하는데요.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친구와 가족, 더 나아가 내가 속한 업계나 사회에 조금은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모두가 팍팍해진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이렇게 순수한 긍정과 희망을 말하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지고,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번 주에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오슬로 미래 도서관(Oslo Future Library)’소개합니다.

오슬로 미래 도서관 ⓒVilma Taubo, Einar Aslaksen

2014년에 시작된 오슬로 미래 도서관(Oslo Future Library)은 영국 출신의 스코틀랜드 예술가 케이티 패터슨(Katie Paterson)이 구상한, 100년에 걸쳐 진행되는 공공 예술 작품입니다. 패터슨은 나무의 나이테와 책의 장(章)을 연결 짓는 생각에서 출발해, 오슬로 외곽 숲에 1000그루의 나무를 심고 한 세기 뒤 그 나무로 책을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상상을 제안했어요.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에 나이테를 그리다가 문득 원과 이야기 속 장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했어요. 각각의 장은 시간이 흐르며 성장하는 세계로 가득 차 있었죠. 그러다 보니 서서히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100명의 작가의 목소리로 100년 동안 자라날 숲을 만드는 작품 말이에요.”

패터슨의 이전 작업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수중 마이크를 통해 아이슬란드의 빙하에 전화선을 연결하고, 누구나 전화를 걸어 빙하가 녹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던 ‘바트나이외쿨(Vatnajökull, 2007)’입니다. 멀리 있어 체감하기 어려운, 그래서 쉽게 지엽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자연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오슬로 미래 도서관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프로젝트는 예술가 개인의 작업 범위를 훌쩍 넘어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실제 공간에서 작동할 수 있는 구조와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미래 도서관 트러스트(Future Library Trust)의 이사장인 안네 베아테 호빈(Anne Beate Hovind)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은 자연 대 인간이라는 이분법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100년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죠. 이 프로젝트는 나 자신의 시간 감각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 일이 8년짜리 프로젝트였다면, 아무도 이토록 주목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슬로 미래 도서관을 기획한 케이티 패터슨 ⓒTina Norris
전화를 걸어 빙하가 녹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케이티 패터슨의 프로젝트 ⓒKatie Paterson

흥미로운 점은 이 프로젝트가 오슬로 시뿐만 아니라, 오슬로 도심 개발 회사인 비외르비카 우트비클링(Bjørvika Utvikling)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1,000그루의 나무가 심긴 숲은 이 프로젝트 덕분에 향후 100년 동안 개발이 불가능한 보호 구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발을 통해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도시 개발 회사가 왜 이런 프로젝트를 후원했을까요?

비외르비카 우트비클링은 오슬로 항만 재개발의 핵심 구역인 비외르비카를 장기간에 걸쳐 개발하는 회사로, 단순한 부동산 공급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을 만드는 플레이스메이킹(Place-making)을 중요한 전략으로 삼고 있습니다. 도시 개발 회사가 일부 땅을 100년간 개발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선언을 통해 “지금 잘 팔리는 도시”가 아니라 “100년 뒤에도 이야기될 도시”를 기업의 강력한 스토리로 끌어들이는 전략으로 볼 수 있어요.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도시의 서사, 다시 말해 내러티브 자산(Narrative Asset)에 투자하는 방식인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외르비카 우트비클링은 ‘슬로우 스페이스(Slow Space)’라는 공공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오슬로 미래 도서관 역시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어요. 어쩌면 이들은 땅을 개발하는 대신에 시간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2014년 여름, 케이티 패터슨이 오슬로의 도시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구상이 구체화되었고, 당시 공공 예술 책임자였던 안네 베아테 호빈이 커미셔너이자 프로듀서로 참여해 이를 현실로 만들었죠. 이후 오슬로 시와 협력하여 미래 도서관 트러스트(Future Library Trust)를 설립하고, 숲과 도서관 공간에 대한 장기 보호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실제로 100년 동안 지속될 수 있는 행정적·물리적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한강 작가의 원고를 봉헌한 2018년의 봉헌식 ⓒBjørvika Utvikling, Kristin von Hirsch
100년 뒤에 책으로 변하게 될 나무 ⓒKristin von Hirsch

어떻게 하면 작가들에게 생전에 읽히지 않을 책을 쓰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안네 베아테 호빈은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냐고요? 그냥 물어보면 됩니다. 정말 흥미로운 일이에요. 이 프로젝트는 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거창하게 포장된 것도 아닙니다. 작지만 단단한 기반 위에서 천천히 이어지고 있죠. 그래서 오히려 더 개인적으로 느껴지고, 잘난 척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에 공감하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의미와 진정성 있는 내용, 그리고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죠.”

미래 도서관은 앞으로 100년 동안, 매년 한 명의 작가가 새로운 원고를 기증하고 이를 보관하는 독특한 구조로 운영됩니다. 이 프로젝트는 오슬로 미래 도서관 트러스트를 통해 관리되며, 케이티 패터슨과 안네 베아테 호빈을 포함한 7명의 이사진이 이를 책임지고 있어요. 위원회에는 노르웨이와 영국의 출판인, 미국의 미술관장 등이 참여하고 있고, 매년 가을 새로운 작가를 선정합니다. 기준은 단순합니다. 이 작가가 지금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의 상상력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선정된 작가는 이듬해 초여름, 오슬로 외곽 노르드마르카 숲에서 열리는 공개 원고 봉헌식에 참여합니다. 작가가 직접 숲을 걸어 들어와 자신의 원고를 밀봉해 전달하는 이 의식은 해마다 반복되는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누군가의 글이 아직 읽히지 않은 채로 숲과 함께 긴 시간을 견디기 시작하는 흥미로운 순간이죠. 타임캡슐처럼요.

지금까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4년 —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2015년 — 데이비드 미첼 (David Mitchell)
2016년 — 쇼온 (Sjón)
2017년 — 엘리프 샤팍 (Elif Shafak)
2018년 — 한강 (Han Kang) 
2019년 —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Karl Ove Knausgård)
2020년 — 오션 부옹 (Ocean Vuong)
2021년 — 치치 단가렘브가 (Tsitsi Dangarembga)
2022년 — 유디트 샬란스키 (Judith Schalansky)
2023년 — 발레리아 루이셀리 (Valeria Luiselli)
2024년 — 토미 오렌지 (Tommy Orange)
2025년 — 아미타브 고쉬 (Amitav Ghosh)

오슬도 중앙 도서관에 마련된 침묵의 방 입구 ⓒEinar Aslaksen
침묵의 방에 보관된 원고들 ⓒEinar Aslaksen

미래 도서관은 노르웨이 오슬로라는 지역적 특성과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케이티 패터슨은 오슬로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숲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도시’이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를 펼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2014년, 프로젝트 팀이 오슬로 외곽 노르드마르카(Nordmarka) 숲에 1,000그루의 노르웨이산 가문비나무 묘목을 심을 당시에, 오슬로시 환경국의 임업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숲 조성이 지역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세심하게 검토했습니다. 노르드마르카는 오래전부터 오슬로 시민들의 휴식처였고,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기 위해 100년 넘게 개발이 제한되어 온 보호 지역이기도 한데요. 그런 점에서 미래 도서관은 오슬로의 녹지 보존 정책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죠.

동시에 기탁된 원고들은 오슬로 시의 신축 중앙도서관인 다이히만 비요르비카(Deichman Bjørvika) 안에 마련된 침묵의 방(Silent Room)에 보관됩니다. 이 공간은 케이티 패터슨이 도서관 건축가들과 함께 설계한 곳으로, 내부 벽면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100겹으로 쌓여 있는 독특한 구조의 공간이에요. 이 목재들은 모두 2014년 숲을 조성하며 간벌된 나무들로 만들어졌고, 각 층마다 해당 연도의 원고가 들어갈 유리 서랍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방은 2022년에 일반에 공개되었지만, 그 안의 원고 상자들은 2114년까지 열람할 수 없어요. 오슬로 시는 이 숲과 도서관 보관실을 100년 동안 보호하기 위한 공식 협약을 체결했고, 이를 뒷받침할 행정적·법적 장치도 이미 마련해 두었기 때문인데요.

지역 문화 생활의 중심인 도서관과 지역 자연 환경의 중심인 숲을 이렇게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는 방식이 이 프로젝트가 지역성을 바라보는 태도의 핵심이라고 느껴집니다. 단순한 복지나 공공 서비스의 차원을 넘어, 문학이라는 예술적 성취와 자연의 보존, 그리고 현재 세대가 힘을 모아 만들어낸 메시지를 100년 뒤 누군지도 모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인데요. 동시에 그 메시지는 지역에서 시작되어 다시 지역으로 이어지고, 또 지역에서 세계로 계속 발신되는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케이티 패터슨의 나이테 그림 ⓒKatie Paterson

오슬로 미래 도서관에 첫 번째 원고를 기고한 마거릿 애트우드는 자신의 글이 100년 뒤에 읽히게 될 바로 그 순간을 이렇게 상상합니다.

“내 목소리가 — 그때쯤이면 오래도록 침묵해 있겠지만 — 100년 만에 갑자기 깨어난다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이 그것을 상자에서 꺼내 첫 페이지를 펼칠 때 과연 무엇이라 말하게 될까요?”

늘 휴대폰을 통해 세계의 거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콘텐츠와 재화를 즉각적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100년 뒤의 이름 모를 누군가를 떠올리는 이 프로젝트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특히 ‘미래’라는 단어와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도 그렇죠. 요즘 우리가 이야기하는 ‘미래’는 대개 디스토피아적 허무주의이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낙관적인 유토피아이거나, 혹은 몇 년 뒤의 윤택한 삶을 위해 미래를 소모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관한 것이니까요.

안네 베아테 호빈은 스티븐 호킹이 말한 ‘대성당 사고(Cathedral Thinking)’를 인용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심이라기보다는, 어려운 과제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대성당을 염두에 두고 구상하는 프로젝트가 많지 않거든요. 기념물이나 건물조차 100년 동안 완공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고, 예술 작품은 더더욱 그렇죠.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100년이 결코 길지 않다는 걸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정말 환상적인 여정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이 일에 참여하게 되어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는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의 오늘, 그리고 100년 뒤 누군가의 오늘을 바꿀 수 있는 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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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하지 않은 럭셔리

럭셔리하지 않은 럭셔리

럭셔리는 원래부터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상대성이 훨씬 더 세밀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처럼 하나의 기준이나 가격표, 혹은 모두가 동경하는 이미지로 설명되는 사치는 점점 힘을 잃는 대신에, 각자가 선택한 삶의 방향과 취향만큼이나 럭셔리의 의미도 제각각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FOMO에 따라가야 할 대상이나 미디어를 통해 주입된 ‘이 정도는 누려야 한다’는 기준을 좇기보다는 스스로 느끼고 정의하는 감각이 중요해진 사회에 가까워졌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누군가에게는 바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럭셔리일 수 있고요. 또 누군가에게는 숨이 차오른 끝에 도착한 산 정상에서 마주하는 풍경이 가장 사치스러운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아프지 않고, 큰 사건 없이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값진 럭셔리일 수도 있고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럭셔리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언어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럭셔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에는 지역성의 가치를 럭셔리로 치환하는 여관 ‘포고 아일랜드 인(Fogo Island Inn)’을 소개합니다.

포고 아일랜드 인 ⓒAlex Fradkin

2013년에 문을 연 포고 아일랜드 인(Fogo Island Inn) 프로젝트의 시작에는 비영리 조직 쇼어패스트(Shorefast)가 있습니다. 쇼어패스트는 어부들이 배와 해안을 연결하기 위해 쓰던 줄의 이름입니다. 배가 조류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육지에 단단히 묶어두는 로프죠. 포고 아일랜드 인을 기획한 지타 콥(Zita Cobb)은 이 단어를 자신의 재단 이름으로 선택했습니다. 섬을 떠나 글로벌 기업가로 성공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이 로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에 가까웠을 겁니다.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지역에 위치한 포고 아일랜드는 한때 대구 어업으로 번성했던 섬이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어장이 붕괴되면서 경제는 급격히 무너졌고, 젊은 사람들은 하나둘 섬을 떠났습니다. 포고 섬에서 8대째 살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지타 콥이 섬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는데요. 16살에 섬을 떠난 그녀는 오타와에서 경영향을 공부하고, 산호세와 오타와에 지사를 둔 광섬유 회사 JDS 유니페이스의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되었습니다. 42세에 은퇴할 당시 그녀의 자산은 6,900만 달러에 달했는데요. 부모님을 일찍 여읜 콥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5년 동안의 세계 일주를 통해 상업화로 인해 세상이 얼마나 획일화되었는지,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가들이 끝없이 늘어선 모습을 보았습니다. 콥은 고향으로 돌아와 여관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호텔도 아니고, 리조트도 아니었죠. 여행자를 위한 장소, 섬의 과거를 새로운 미래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일종의 배 같은 곳 말입니다. 

“저는 빈털터리로 죽을 생각이에요. 저는 무일푼으로 시작했거든요. 다시 무일푼으로 돌아갈 거예요. 돈이 왜 필요하겠어요?
(…)
여관을 차리는 아이디어는 쉬운 부분이었어요. 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요. 정말 죽을 뻔 했어요.”

쇼어패스트 재단의 이사장이자 포고 아일랜드 인을 기획한 지타 콥 ⓒLuther Caverly

포고 아일랜드 인의 가장 특이한 점은 소유 구조입니다. 이 호텔은 기업이 아니라 지타 콥이 설립한 비영리 재단인 쇼어패스트(Shorefast)가 소유하고 운영합니다. 호텔에서 발생한 수익은 전부 지역 사회로 돌아가죠. 포고 아일랜드 인은 섬에서 가장 큰 고용원이자 섬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인 생선을 소비하는 핵심적인 거래처 중 하나이며, 지역 사업에 무담보로 소액 대출을 제공하고, 호텔의 모든 가구와 집기를 만든 지역 장인들의 작업실을 유지하고, 주민들을 위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쓰입니다. 

로컬을 글로벌한 수준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이익을 다시 지역에 되돌려준다는 쇼어패스트의 철학 ⓒShorefast
포고섬에 대대로 내려오는 퀼트 무늬에서 영감을 받은 쇼어패스트의 운영 방식 ⓒShorefast

보통 럭셔리 호텔이 지역에서 돈을 벌어 외부로 가져간다면, 이곳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셈인데요. 외부에서 들어온 소비가 섬 안에서 순환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호텔 가구는 지역 목수들이 만들고, 침대 위의 퀼트는 섬의 여성들이 손으로 꿰맵니다. 레스토랑의 식재료도 최대한 섬과 인근 해역에서 조달합니다.

그래서 포고 아일랜드 인은 양적인 성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객실 수는 29개로 고정되어 있고, 체인화 계획도 없습니다. 지타 콥은 오히려 ‘우리 호텔이 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작아지길 바란다’고 말했어요. 호텔 하나가 지역을 먹여 살리는 구조가 아니라, 호텔이 없어져도 지역이 굴러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럭셔리 호텔이라기보다는 지역 경제를 위한 하나의 인프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경제 영양 성분표(Economic Nutrition Label) ⓒShorefast

이러한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경제적 영양 시스템(Economic Nutrition)’입니다. 모든 투숙객에게 ‘경제적 영양 성분표(Economic Nutrition Label)’는 라는 문서가 제공되는데요. 호텔 내에서 판매되는 가구, 텍스타일, 의류, 소품들 역시 모두 같은 기준으로 경제 영양 성분표를 붙였습니다. 우리가 식품 포장지에서 칼로리와 영양소 함량을 확인하듯, 이 호텔에서는 모든 비용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불한 비용 가운데 얼마가 직원 급여로 쓰이고, 얼마가 지역 식재료와 물품 조달에 쓰이며, 또 얼마가 유지관리와 지역 재투자에 배분되는지까지 세부 항목으로 나뉘어 적혀 있어요. 이러한 시스템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럭셔리를 소비하는 행위가 단순히 개인의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어떤 구조를 통해 지역 경제에 편입되는지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이 투명한 시스템은 쇼어패스트의 철학 그 자체입니다. 전략적으로 기획된 시스템인 동시에 강하게 느껴지는 건 소비자에 대한 신뢰입니다. 단순히 ‘친환경’이나 ‘에코’라는 허울뿐일 수 있는 마케팅 용어가 아니라, 충분한 것 이상의 정보를 기반으로 정확히 무엇에 돈을 소비하고 있는가를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소비자에 대한 믿음이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이 시스템을 포고 아일랜드 인만의 내부 규칙으로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쇼어패스트 재단은 이 방식을 지역의 다른 소규모 비즈니스에도 적용 가능한 일종의 ‘인증 체계’로 발전시켰습니다. 단순한 마케팅 도구가 아니라 경제 활동이 지역 사회에 어떤 영양분을 공급하는지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공용 언어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죠. 지타 콥은 포고 아일랜드 인을 열기 훨씬 전, 동네에서 만난 어부 아모스와의 대화에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왜 대구(codfish) 1파운드에 49센트도 못 받는데, 사람들은 핸드백 하나에 5,000달러나 지불하는 걸까요? 우리도 생선을 남들에게 뽐내기 위한 명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걸까요?” 

콥은 여기에서 핵심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왜 어떤 물건은 그 생산 과정과 사람들의 얼굴이 지워진 채 가격만 남고, 어떤 물건은 브랜드라는 이름으로 과잉된 의미를 부여받는가? 

그녀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어요. 상품의 가격이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와 사람, 노동의 현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싼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그 과정이 지역 사회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는 거의 고려하지 않죠. 대신 브랜드의 이야기와 희소성을 소비합니다. 반대로 아모스가 잡은 생선에는 실제 사람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 있지만, 그 가치는 시장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경제 영양 성분표는 바로 이 단절을 다시 연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가격을 감추는 대신에 가격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드러내고, 소비를 은폐된 행위가 아니라 관계 맺는 방식으로 바꾸려는 시도죠. 그래서 포고 아일랜드 인에서의 하룻밤은 단순한 레저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인 셈입니다. 어떤 경제 논리에 참여할 것인가, 어떤 지역과 사람들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 말입니다. 

호텔 근처에 위치한 포고 아일랜드 아츠 레지던시 ⓒFogo Island Arts
호텔 1층에 위치한 포고 아일랜드 아츠 갤러리 ⓒFogo Island Inn
지역 장인과 협업한 호텔 영화관의 카펫 ⓒFogo Island Inn

포고 아일랜드 인의 1층에는 이 호텔이 단순한 숙박 시설을 넘어 하나의 문화 플랫폼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공간들이 모여 있습니다. 쇼어패스트(Shorefast) 산하 예술 기관인 포고 아일랜드 아트(Fogo Island Arts)의 갤러리, 뉴펀들랜드 출신 셰프 머레이 맥도널드(Murray McDonald)가 이끄는 레스토랑, 그리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도서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갤러리에서는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들이 포고 아일랜드 아츠 레지던시에 머무는 동안 제작한 작품들을 정기적으로 전시합니다. 섬의 지형, 어업의 풍경, 고립된 생활 리듬 같은 요소들이 작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그 결과물들이 다시 호텔을 찾은 방문객과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구조인데요. 

레스토랑에서는 바다빙산에서 잘라낸 얼음을 활용한 소르베나 칵테일, 갓 잡은 바닷가재 스튜처럼 포고섬과 인근 해역에서 얻은 식재료를 중심으로 한 요리를 선보입니다. 특히 포고 아일랜드 피쉬(Fogo Island Fish)라는 별도의 브랜드를 만들어서 미식 경험이 곧 지역 경제로 이어지도록 설계한 점이 인상적이에요. 이 사회적 사업은 지역 어부들과 포고 아일랜드 협동조합과 직접 계약을 맺고 대규모 조업이 아닌 손낚시 방식으로 잡은 해산물만을 취급합니다. 

도서관은 투숙객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섬을 기록하기 위해 만든 작은 아카이브에 가깝습니다. 도서관 건립에 사용된 기초 자재는 메모리얼 대학교 뉴펀들랜드 캠퍼스의 전 총장인 레슬리 해리스(Leslie Harris) 박사가 기증한 것인데요.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증한 뉴펀들랜드의 역사, 어업 문화, 이주와 정착의 기록, 지역 작가들의 책들이 모여 있습니다. 

2층에는 체육관과 회의실, 그리고 작은 영화관이 있습니다. 이 영화관은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와 협력해 운영되고 있는데요. 상업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적인 작품, 캐나다의 지역과 공동체를 다룬 기록 영화들이 주로 상영되고 있고, 투숙객들은 이곳에서 무료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포고 아일랜드 인의 전경 ⓒShonquis Moreno
포고 아일랜드 인의 객실 ⓒAlex Fradkin

건축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인 토드 손더스(Todd Saunders)가, 인테리어는 영국의 디자이너 일세 크로포드(Ilse Crawford), 그래픽 디자인은 캐나다의 디자이너 브루스 마우(Bruce Mau)가 맡았습니다.

쇼어패스트가 섬의 어부들이 사용하는 로프의 이름을 딴 것처럼, 포고 아일랜드 인의 건축은 섬의 전통 구조에서 출발했습니다. 포고섬의 전통 어업 시설인 솔트박스 하우스’ 의 형태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는데요. 바닷가 바위 위에 말뚝을 세워 그 위에 건물을 띄우는 방식입니다. 자연을 밀어내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건물 자체가 풍경 위에 살짝 얹혀 있는 형태죠. 

포고 아일랜드 인의 실내 공간은 현대 디자이너와 지역 장인이 협업한 수작업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쇼어패스트는 포고 아일랜드 인 프로젝트의 초기부터호텔을 채운 모든 물건들을 통해 섬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기획 의도로 디자인 워크숍을 열었고, 호텔 곳곳에 놓인 의자, 테이블, 조명, 벽지, 러그, 침대보 등은 모두 디자이너들이 포고섬에 머무르며 지역 장인들과 함께 구상해서 맞춤으로 제작한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객실에 비치된 흔들의자는 현지 목수가 섬의 전통 배 ‘펀트(punt)’의 형상을 모티브로, 레스토랑의 식탁은 오래된 어선 판자를 재활용해, 객실 침대를 덮고 있는 형형색색의 퀼트 담요는 각기 다른 마을의 전통 패턴을 기반으로 제작되었어요. 이렇게 장인들과 협업한 컬렉션 중에서 일부는 포고 아일랜드 워크샵(Fogo Island Workshops)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판매하고, 수익을 다시 지역의 제작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배 타고 대구 낚시하기 ⓒFogo Island Inn
들판에서 열매 따기 ⓒFogo Island Inn
등산하고 빙하 보기 ⓒFogo Island Inn

포고 아일랜드 인은 1년을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닌 일곱 가지 계절(Seven Seasons)로 나눠서 계절별로 최적화된 액티비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3~4월에는 바다가 얼음으로 뒤덮이는 장관을 감상하며 개썰매 타기빙하 관측을, 6월에는 전통 통발낚시가 열리던 시기를 기념하여 참가자들이 어부와 함께 바다에 나가 대구낚시를 할 수도 있습니다. 7~8월 여름에는 드넓은 들판에서 야생화를 구경하거나 배를 타고 고래를 관찰하는 보트 투어를 하고, 9월 중순부터는 섬 전역에서 자라는 들쭉, 월귤, 크랜베리를 따서 잼을 만들 수도 있어요. 10~11월 늦가을엔 폭풍이 잦아 실내에서 퀼트나 가죽공예 워크숍에 참여하기 좋고, 12~2월 겨울에는 얼음낚시, 눈썰매 를 탈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커뮤니티 호스트와 함께 하는 투어입니다. 포고 아일랜드 인은 모든 투숙객들에게 반나절 가량의 맞춤 섬 소개를 무료로 제공하는데요. 손님마다 한 명의 지역 주민이 커뮤니티 호스트로 배정되어 자기 차로 섬을 안내합니다. 이 호스트들은 어부, 선생님, 공예가 등 각양각색의 배경을 지닌 포고섬의 주민들로, 여행객들에게 마을별 숨은 이야기, 바닷가 절벽의 전설, 자신이 겪은 섬 생활 등을 마을의 손님들에게 생생히 들려줍니다.

포고 아일랜드 인의 전경 ⓒFogo Island Inn

포고 아일랜드 인은 2024년에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하는 호텔 가이드인 미슐랭 키(The MICHELIN Keys)로부터 캐나다 전체를 통틀어 3키를 획득한 호텔 단 두 곳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포고 아일랜드 인의 창업자 지타 콥(Zita Cobb)은 25년 10월 CBC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섬에서 일어난 일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핵심은 그곳 사람들이 자기 것을 믿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죠.  

물고기는 물 속에 있으면서 물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우린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지타 콥과 포고 아일랜드 인 프로젝트의 이야기에서 럭셔리가 성립하는 지점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럭셔리는 우리 삶에 필요할까요?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 우리는 럭셔리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함에서 시작됩니다. 어디서나 복제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오직 그 장소에서만 가능한 감각일 때,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럭셔리하다’고 느끼게 되지요. 그래서 요즘의 럭셔리는 점점 브랜드나 가격이 아니라 좌표와 맥락으로 설명되는 쪽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지역성이라는 말은 종종 낡거나 불편한 것으로 오해받습니다. 접근성이 떨어지고, 지루하고, 상업성이 떨어지고, 효율이 낮고, 표준화되지 않은 것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역성은 현대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복제 불가능한 자산’ 중에 하나입니다. 기후, 지형, 산업의 흔적, 사람들이 쌓아온 말투와 식습관, 계절을 대하는 방식까지. 이런 요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질 수 없거니와, 다른 곳에서 그대로 옮겨올 수도 없습니다. 시간과 반복, 그리고 생활이라는 느리고 지난한 축적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지역성을 기반으로 한 럭셔리는 본질적으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규모를 키우기도 어렵고, 빠르게 성장하기도 힘들죠. 대신에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확률이 높습니다. 유행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기억 속에 남는 장면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정의하는 럭셔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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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짜리 지역 만들기

한 평짜리 지역 만들기

물리적이든 관념적이든 대부분의 경우에 제약은 생각의 출발점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스스로와 동료들에게 물어보죠.

“이 정도 예산으로 가능할까?”
“그건 원래 저런 방식으로 하는 거야.”
“그건 너무 작지 않아?”

그 질문들은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능성에 경계를 긋는 말들입니다. 그럴때면 아이디어를 만든다는 건 종종 그 경계에 뭔가를 ‘끼워 맞추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한정된 조건, 익숙한 구조, 검증된 수치 안에서 결과를 뽑아내야 하는 상황.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상상하지 않도록’ 훈련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파는 번뜩이는 거창한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진짜 상상력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두 세계를 단순히 ‘연결’해보는 데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기존의 것들, 낯선 조각들, 이전에 조합해본 적 없는 방식들. 그것들이 느슨하게 엮이면서 어느 순간 예상하지 못한 감각이 발생합니다. 그건 누구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새로움을 만들어냅니다.

어쩌면 우리가 새로움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로움이 발생할 수 있는 조합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자판기 브랜드 ‘후루사토 아큐아(Furusato Acure)’ 소개합니다.

지하철 플랫폼에 설치된 아큐아(Acure) 자판기 ⓒShutterstock

‘후루사토 아큐아(ふるさとアキュア)’는 JR동일본(JR東日本) 그룹의 자회사인 JR동일본 크로스 스테이션 워터 비즈니스 컴퍼니(JR Cross Water Business Company)가 2024년 11월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고향(Furusato)의 매력(Acure)을 연결하는 자판기’를 콘셉트로, 역 내 자판기 브랜드 acure(아큐어)의 확장형인 이벤트 아큐어 시리즈 중 하나로 기획되었죠. 각 지역의 특산품을 테마별로 선보이는 ‘자판기 형태의 안테나숍’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우선 후루사토 아큐아를 담당하는 워터 비즈니스 컴퍼니의 태생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JR동일본 크로스 스테이션은 2021년 4월 1일, JR동일본 산하 역 관련 4개 자회사를 통합해 출범한 완전 자회사로, 역(Station) 공간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조직입니다. 리테일, 푸드, 자판기, 상업시설 개발 등 다양한 역 내 비즈니스를 하나로 묶어 시너지와 효율을 높이는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크로스 스테이션(Cross Station)’이라는 사명에는 다양한 업태와 사람의 ‘교차’를 만들어간다는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2025년을 기준으로 이 회사는 약 3,000명의 직원을 두고 JR동일본 관내 약 2,000개의 점포, 1만 2천 대의 자판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4년 기준 연간 영업수익은 2,668억 엔, 점포 매출은 3,851억 엔에 달해 일본 최대급 역 비즈니스 운영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어요

이 중 후루사토 아큐아를 기획한 워터비즈니스 사업부문은 자판기(VM) 운영과 음료 상품 개발을 담당하며, JR동일본 자판기의 통합 브랜드인 아큐아(acure)를 통해 다양한 음료 자판기를 관리합니다. ‘From AQUA’ 같은 자체 음료 브랜드도 자체 개발한 대표적인 제품이에요. 신칸센 개통을 위한 터널 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솟아난 지하수를 제품화한 것인데요. 이처럼 워터 비즈니스 컴퍼니의 사업은 JR동일본의 지역 재발견 프로젝트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루사토 아큐아 프로젝트 역시 지역 원재료를 활용한 음료 개발을 지속하는 연장선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즉, 자판기를 통해 도시 승객과 지역 특산물을 연결하고, 이를 통해 지방 소득과 브랜드를 동시에 키우려는 전략적 실험이라 할 수 있어요.

 

자판기에서 판매되는 PB 상품 브랜드 '아큐아 메이드(Acure Made)' ⓒJR Cross

후루사토 아큐아는 JR동일본의 자체 자판기 브랜드 ‘아큐아(Acure)’의 라인업 중 하나인데요. 아큐아는 단순한 자판기가 아니라 아주 작은 편집샵처럼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순간에 어울리는 제안을 전하는 자판기 브랜드입니다.

예를 들어, 두유 전문 자판기인 ‘플러스 아큐아 두유(Plus Acure)’, 학생들이 선호하는 음료로 구성한 ‘스쿨 아큐아(School Acure)’, 기간과 테마에 따라 판매 제품이 달라지는 ‘이벤트 아큐아(Event Acure)’, 아큐아의 소비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획한 PB브랜드 ‘아큐아 메이드(Acure Made)’ 등이 있죠. 이처럼 아큐아는 소비자의 니즈는 물론, 자판기가 설치된 역 주변의 지역적 특성까지 디테일하게 반영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큐아는 이러한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어요.

“언제나, 그 장소에 있어
만나게 될 때마다 즐거워지는.
그러한 당신의 매일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
한 명 한 명 진지하게 마주하면서도
유희의 마음이 넘쳐나는 제안을 전해드립니다.”

특히 ‘이벤트 아큐아’는 계절이나 이벤트에 맞춰 콘셉트를 설정하고, 다양한 상품을 전개해 나가는 구조예요. 백화점의 행사 공간처럼 테마에 따라 매번 달라지고, 편의점의 매대처럼 화제를 노린 상품군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기존 자판기 운영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유통 실험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파트너십 구조는 기본적으로 지자체 또는 생산자와 JR 측의 협업 모델로, 무엇보다 음료에만 머무르지 않고 식품, 가공품, 기타 지역 특산품까지 다룬다는 점이 눈에 띄는 지점이에요. 이 ‘이벤트 아큐아’의 새로운 기획 라인으로 2024년 10월에 새롭게 등장한 브랜드가 바로 ‘고향(후루사토) 아큐아’ 입니다.

자판기를 통해 판매하는 지역 특산품 쌀 ⓒJR Cross

후루사토 아큐아의 첫 번째 파트너는 인구 약 5,000명의 마을, 후쿠시마현 텐에이촌(天栄村)입니다. 쌀 수확 시즌에 맞춰서 ‘세계 최고 수준의 쌀’로 불리는 ‘텐에이마이(天栄米)’를 자판기를 통해 선보였어요. 이 쌀은 ‘쌀·식미 감정 콩쿠르: 국제대회’에서 금상을 총 12회 수상한 고급 브랜드 쌀입니다. 2024년 10월부터 2025년 3월까지, JR동일본 주요 역사 내 아큐아 자판기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고요. 여기에 더해 텐에이촌의 쌀을 활용해 만든 카레와 향신료 세트를 증정하는 경품 이벤트도 함께 열렸습니다. 단순한 제품 소개를 넘어, 지역성과 연결된 스토리를 구성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파트너는 군마현 미나카미마치입니다. 간토 지방 북단, 다니가와다케와 미쿠니산 자락, 도네강 수계에 위치한 이 마을은 ‘관동의 물병’이라 불릴 만큼 수자원이 풍부하고, 온천과 자연이 인상적인 지역이에요. 여기서는 지역 생산 브랜드들의 생활용 제품이 라인업에 올랐습니다. Local Earth의 야마자쿠라 벌꿀, SUMIKA의 룸 퍼퓸, Licca의 아로마 스프레이가 각각 시기를 나누어 자판기를 통해 판매되었는데요. 특히 벌꿀은 불필요한 가공을 하지 않은 100% 천연 꿀이고, 향수와 아로마 스프레이는 숲 속의 작은 공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증류해 만든 제품입니다. 2025년 10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운영되는 시즌 한정 구성이었어요.

흥미로운 점은, 후루사토 아큐아가 단순히 잘 알려진 지역 특산품만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는 아니라는 점이에요. 지역 고유의 개성이나 소재를 담고 있다면, 그게 공예품이든 향기 제품이든 상관없이 폭넓게 다룬다는 것이죠. 또 자판기 자체를 하나의 작은 지역 정보 플랫폼처럼 꾸미고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상품이 진열된 공간 외에 해당 지역의 이미지, 지도, 교통 정보는 물론, 기차로 가는 시간, 주변 명소와 문화 요소까지 안내되고 있거든요. 철도 회사답게 자판기 너머에 있는 지역에 대한 ‘접근성’의 개념과 관계를 굉장히 잘 설계한 느낌입니다.

운영 전략 면에서도 아큐아는 일반 자판기와 조금 다릅니다. JR동일본에 따르면, 아큐아 자판기에서는 연간 약 2억 건의 구매 데이터가 수집되고 분석되고 있어요. 시간대, 이용자 특성, 위치별 소비 패턴 등을 바탕으로, 자판기 한 대마다 다른 구성을 설계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판기 하나하나가 작은 맞춤형 점포처럼 운영되는 셈이죠. 워터비즈니스컴퍼니의 운영 담당자 카네모토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을에서 겨울,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는 판매 상품의 온도대를 핫에서 콜드로, 혹은 그 반대로 바꿔야 해요. 데이터상으로는 전환 시점을 설정할 수 있지만, 최근 기온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고 예측이 어렵습니다. 결국 자판기를 채우는 오퍼레이터의 경험과 현장감각이 중요해요.”

이처럼 데이터와 현장의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큐아가 자판기 이상의 브랜드로 기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상 어딘가에 늘 있는 자판기 ⓒShutterstock

한편으로는, 자판기 하나에 이토록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과한 상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료한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자판기에서 낯선 음료 하나를 꺼내 먹는 그 작고 이상한 선택이 생각보다 먼 일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죠.

매일 마시던 음료가 어느 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익숙했던 맛의 원산지가 문득 궁금해질 수도 있습니다. 여행지 후보 목록에 이름 하나를 적는 것, 그것이 진짜 여행이 되고, 언젠가 그 음료를 만든 사람과 직접 마주치게 되는 것. 그 지역의 공기와 풍경을 지나치다가, 나중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다시 오게 되는 것. 혹은 아예 그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일.

어쩌면 가능성이란 건 제약의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를 비춰주는 일종의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둘 중 하나가 먼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그 경계 바깥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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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지혜의 힘

오래된 지혜의 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해결책은 늘 새로운 것에 있다고 믿게 된 것 같습니다. 첨단 기술, 정교한 이론, 복잡한 데이터 속에서만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요. 문제를 마주할 때 우리는 검색부터 시작합니다. 아마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똑똑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일겁니다. 마치 삶의 모든 문제는 인간의 지능이 업데이트되기만 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따금 삶의 가장 막막한 순간에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 힌트를 던지곤 합니다. 그러고보면 지혜란 반드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발견하는 능력인지도 모릅니다. 땅과 바다, 그리고 사람의 삶 속에서 느리게 오래 축적되어 온 방식들. 바쁜 시대는 그것을 ‘낡았다’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들은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은 해답이기도 하니까요.

미래의 해결책은 언제나 앞에만 있을까요? 어쩌면 아주 오래되고 단순한 방식들 속에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친환경 식품 브랜드 파타고니아 프로비전(Patagonia Provisions)을 소개합니다.

파타고니아 프로비전 ⓒPatagoina Provisions

파타고니아 프로비전(Patagonia Provisions)은 패션을 통한 환경 보호를 실천해온 파타고니아(Patagonia)가 식품을 통해 지구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자회사입니다. 2012년, 파타고니아의 창업자 이본 쉬나드(Yvon Chouinard)는 ‘사람들은 재킷은 몇 년에 한 번 사지만 음식은 하루에도 몇 번 먹는다. 지구를 구하려면 음식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지트 카메론(Birgit Cameron)과 함께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을 설립했는데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포획한 연어 제품을 시작으로, 텐트나 아웃도어 활동에 어울리는 통조림 생선, 버팔로 육포, 캠핑용 스낵뿐 아니라 맥주, 사케, 유아식, 파스타 등으로 제품군을 폭넓게 확장하고 있는데요.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은 경쟁사와 차별화하기 위해 단순히 친환경 제품을 만들거나 매출의 일부를 환경 단체에 기부하는 방식과는 달리, 처음부터 ‘식품이라는 영역 안에서 환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중심에 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20년, 이본 쉬나드는 ‘왜 음식인가?(Why Food?)’라는 에세이를 통해 파타고니아에서 식품 사업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파타고니아가 왜 음식을 만들고 판매하느냐고요? 내게 진짜 질문은 이겁니다 —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확신하고 있어요. 성공하는 사업과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조건은 결국 같다는 것을요. 흔히 말하는 세 가지 가치 기준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 음식, 물, 그리고 사랑.”

 

와일드 핑크 훈제 연어 통조림 ⓒPatagonia Provisions
오래된 어획 방식인 리프넷(Reef Net) ⓒPatagonia Provisions

흥미로운 점은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이 제품을 기획하는 두 가지 방식입니다. 첫째는 시장성이나 판매 가능성보다 이 제품이 어떤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먼저 고민한다는 점. 둘째는 유전자 조작이나 대량 생산 같은 첨단 기술보다 오랫동안 자연과 공존하며 축적된 지역의 방식을 신뢰한다는 점이에요. 이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품이 바로 와일드 연어 패킷이죠. 매장에서 보면 그저 작고 단정한 주황색 박스 하나일 뿐이지만, 이 작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파타고니아는 어업의 역사, 지역 공동체, 과학자와 환경단체, 그리고 바다의 미래까지 모두 끌어와 엮는 작업을 했습니다.

2010년대 초, 파타고니아는 ‘우리가 양심의 가책 없이 먹을 수 있는 생선이 과연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제품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연어 양식 산업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가두리 양식장이 배출하는 폐수와 항생제, 기생충과 화학물질, 그리고 바다 생태계의 교란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회색빛 연어 살을 인공 색소와 사료로 붉게 만들고, 병들지 않도록 약품을 투여하는 방식이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본 쉬나드와 버지트 카메론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 상품을 개발하는 대신, ‘어떤 방식으로 잡힌 연어라면, 우리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를 먼저 정의하기 시작했는데요. 과학자, 보전 단체, NGO와 함께 자체적인 ‘연어 소싱 기준’을 만들었고, 혼획(잡지 않아도 될 다른 물고기나 어린 연어까지 같이 걸려버리는 일)을 최소화하면서도 장기적으로 개체군을 유지할 수 있는지 검증된 소규모 지역 어업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 중 하나가 워싱턴주 러미 섬(Lummi Island) 인근 해역입니다. 이곳의 어부들은 리프넷(Reef Net) 이라는 매우 오래된 방식으로 연어를 잡는데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띄우고 그 사이에 넓은 그물을 수면 아래 펼쳐 둔 뒤, 해저에는 풀과 그물로 만든 인공 암초를 설치해요. 바다를 거슬러 오는 연어 떼는 이 작은 암초를 따라 수면 가까이로 올라오고, 어부들은 배 위 관측대에서 직접 연어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한 뒤, 그물이 부드럽게 수면 위로 떠오르도록 들어 올리죠. 잡히는 즉시 손으로 선별해, 어린 연어나 다른 종, 보호가 필요한 개체는 상처 없이 다시 바다로 돌려보냅니다.

러미 아일랜드 와일드 어업 협동조합(Lummi Island Wild)라일리 스타크스(Riley Starks)는 이 방식을 연어와 바다에 가장 예의를 갖춘 어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리프넷이 첨단 장비가 아니라, 연어의 이동 경로와 바닷물의 흐름, 지형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토착민들의 지혜에서 비롯된 방식임을 강조하고 있어요. 지금은 태양광으로 그물을 움직이고 최소한의 연료로 조업하기 때문에 혼획률은 사실상 0에 가깝습니다. 파타고니아가 이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어업이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아니라 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제품은 ‘맛있는 연어를 더 많이 먹기 위해’가 아니라, ‘연어를 먹는다면 연어가 어떤 방식으로 포획되는지 관심을 갖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켄자 맥주 ⓒPatagonia Provisions
땅 속 깊이 뿌리내리는 컨자 ⓒPatagonia Provisions

연어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돌보면서 인간의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의 대표적인 제품 중 하나가 바로 밀 대신 컨자(Kernza)로 만든 맥주입니다. 이 평범해 보이는 맥주는 사실 단순한 대체 곡물 실험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는 곧 농업의 미래이며, 농업이 직면한 핵심 문제는 생산량이 아니라 토양의 시간, 땅의 회복력, 생태의 지속성’이라는 통찰에서 시작되었어요. 컨자라는 이름부터 생소한 이 작물은 오늘날 농업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중요한 해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맥주는 1년만 자라고 뿌리를 뽑아버리는 1년생 곡물로 만들어집니다. 밀, 보리, 호밀 등 거의 대부분이 그렇지요. 매년 경작과 수확을 반복하며 땅은 쉬지 못하고, 토양은 점점 얇아지며, 미생물과 영양분은 사라집니다. 산업형 농업은 땅을 ‘잠시 빌려 쓰는 방식’이 아니라, 땅의 시간을 빼앗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파타고니아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만약 곡물을 매년 뽑지 않고 몇 해 동안 그대로 두고 키울 수만 있다면 땅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 질문의 답으로 등장한 작물이 바로 컨자(Kernza)입니다. 미국 토양 연구소(The Land Institute)에서 개발한 컨자는 다년생 밀의 한 종류로, 뿌리를 3m 이상 깊숙이 토양 속으로 내리는 게 특징인데요. 뿌리가 뽑히지 않으니 농부는 매년 경작 기계를 동원해 땅을 갈 필요가 없고, 토양이 압박되거나 유실되는 일도 줄어듭니다. 그 결과 땅은 스스로 회복할 시간을 갖게 되고, 토양 유기물의 양이 눈에 띄게 증가하며, 탄소를 땅속 깊숙이 저장하게 됩니다. 컨자는 스스로 토양을 붙잡아 침식을 막고 비료 없이도 자라면서도 주변 식생을 회복시키는 능력까지 갖고 있어요. 

미국 토양 연구소(The Land Institute)의 창립자이자 식물학자인 웨스 잭슨(Wes Jackson)은 컨자 개발을 이끈 인물인데요. 그는 컨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농업의 진짜 혁신은 새로운 기계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땅과 오래 함께 지낼 수 있는 식물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컨자를 개발하면서 던진 첫 질문은 ‘이 땅에는 원래 어떤 식물이 있었을까?’ 였어요. 켄자스에는 원래 초원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초원의 방식을 농사로 가져오기로 한 거죠. 농사는 풀을 자르는 일이 아니라, 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입니다.”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은 컨자를 단순히 새로운 식재료로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컨자를 키우는 방식, 그리고 그 방식을 고수하는 농부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요. 그래서 이 작물을 키우는 농부들을 찾아 캔자스, 미네소타, 몬태나, 워싱턴주 등을 직접 찾아 나섰고, 그들의 토양을 읽는 방식, 해마다 땅을 갈지 않는 농사, 비료 없이 키우는 농사, 생태계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관찰하면서 제품을 기획했습니다.

결국 파타고니아는 이 작물을 맥주와 연결했습니다. 맥주라는 가장 일상적인 식품 안에 토양과 기후, 농업과 생태 회복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강력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켄자 골든 에일(Kernza Golden Ale)’입니다. 

“음, 우선, 저희는 맛있는 맥주를 정말 좋아해요. 맥주는 결국 농산물이잖아요.”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의 제품들 ⓒLogan Watts and Joel Caldwell

버팔로 육포와 렌틸 파스타도 마찬가지로, 초원을 되살리는 방목 방식과 토양을 회복시키는 작물이라는 특성을 넘어 음식을 통해 생태가 스스로 회복될 수 있는 시스템을 지지한다는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 제품들이에요. 이 제품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는가?’ 라는 질문을 넘어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요.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이 말하는 ‘지속가능한 식품’은 단지 환경친화적인 소비재를 만드는 기술이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 지역이 오랫동안 지켜온 방식을 존중하면서, 농업과 어업, 축산업을 통해 사람과 땅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로컬 생태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아마도 누군가는 소규모 농어촌에 대기업이 들어와 큰 규모로 생산하면 지역 경제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 결과는 이 관점에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규모와 효율 중심의 접근 방식이 아니라, 땅이 회복될 수 있는 속도, 지역이 유지될 수 있는 시간, 삶이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다시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파타고니아는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한 유통망과 비즈니스의 언어로 연결해 그 지역이 그 방식으로 다음 세대까지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한 실천적인 해결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합니다. 이것이 파타고니아가 생각하는 진짜 혁신이며, 사업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어요.

 

파타고니아와 함께하는 캠핑 ⓒLogan Watts and Joel Caldwell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것은, 파타고니아의 식품이 단지 ‘착해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굳건한 지지층을 가진 파타고니아라는 브랜드처럼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의 음식은 맛있고, 간편하고, 멋있고, 쿨합니다. 캠핑에서, 트레일에서, 사무실 책상 위에서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친근한 매력을 갖고 있어요.

웹사이트의 랜딩 페이지에는 각 식품의 원산지와 생산 방식, 그리고 그 제품이 해결하고자 하는 생태적 문제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제품 상자에는 살아 있던 연어의 선화가 그려져 있어, 우리가 ‘살아 있었던 생명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환기시켜주고요. 패키지 안쪽에는 물고기, 땅, 사람, 소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작은 지도가 들어 있습니다.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의 공동 창업자이자 디렉터인 버지트 캐머런(Birgit Cameron)은 회사의 목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본이 내게 던진 질문은 ‘파타고니아다운 식품회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였어요. 우리는 사람들이 음식을 재배하고 만드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식품 비즈니스를 만들고 있어요. 우리의 목표는 기후를 우선시하면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의 통조림 ⓒMike Falco

80대의 식물학자 웨스 잭슨은 파타고니아 프로비전 맥주에 들어가는 컨자 품종을 개발해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당신이 평생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너무 작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미래의 해결책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눈부신 첨단 기술들 역시 한순간에 발명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경험과 관찰, 실패와 실험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현재형 미래 시제’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어떤 문제에 가장 적합한 해법은 많은 분야에 두루 쓰일 수 있는 거대한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땅 위에서 사람과 자연이 오래 함께 지내며 단련해온 지역의 방식과 오래된 지혜의 힘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과 지역을, 그 지혜가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연결해주는 능력 — 바로 그 힘이야말로, 어쩌면 AI의 기술을 빌려서라도 다음 세대와 우리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큐레이션의 기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은 무엇을 먹어야 할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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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운동장으로

새로운 운동장으로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시절을 떠올리면, 우리는 늘 학교가 정해둔 규칙 안에서 선생님들이 만들어둔 문제의 정답을 찾느라 바빴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벗어나 사회로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문제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고,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오히려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나만의 답을 찾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되돌아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는 실패가 허락되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은 틀리고, 부끄럽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싱가포르의 옛 학교를 개조해 만든 복합문화공간 ‘뉴바루(New Bahru)’를 소개합니다.

뉴바루 ⓒRilly Chen

싱가포르 리버밸리 주택가에 2024년 문을 연 복합 문화공간 뉴바루(New Bahru)는 싱가포르 로컬 호스피탈리티 기업 로앤비홀드 그룹(The Lo & Behold Group)이 주도해서 만든 ‘크리에이티브 클러스터(Creative Cluster)’ 프로젝트입니다. 1969년에 지어진 옛 난차우(Nan Chiau) 고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재생한 이 공간은 약 2만㎡ 규모의 부지 위에 40여 개의 독립 로컬 브랜드들로 채워져 있는데요. 단순히 트렌디한 상업시설이라기보다는, 도시 안에서 창작과 실험, 그리고 일상의 영감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뉴바루의 태생에는 이 공간을 기획하고, 브랜드를 모으고, 운영까지 이어온 로앤비홀드 그룹의 독특한 철학과 태도가 담겨 있어요.

로앤비홀드 그룹은 ‘도시에 하루 종일 머무르며 싱가포르만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어요. 그래서 ‘도시를 더 사랑스럽게 만들기(Making Our City More Lovable)’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싱가포르의 창의적인 사람들과 로컬 브랜드들이 연결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왔습니다. 2005년 싱가포르 최초의 루프탑 바 루프(Loof)를 시작으로, 2010년 싱가포르 최초의 비치 클럽인 탄종 비치 클럽(Tanjong Beach Club), 2017년 1800년대 창고를 개조해 디자인 호텔로 만든 더 웨어하우스 호텔(The Warehouse Hotel), 2019년 미쉐린 3스타를 달성한 파인다이닝 오데뜨(Odette), 2021년 프렌치 레스토랑 클로딘(Claudine), 2023년 이탈리안 비치 레스토랑 피코(Fico)를 거쳐2024년의 뉴바루(New Bahru)까지. 로앤비홀드 그룹은 싱가포르 리테일 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호스피탈리티-플레이스메이킹 플레이어 중 하나로 꼽히고 있어요.

로앤비홀드 그룹의 공동 창업자이자 매니징 파트너인 ‘위 텡 웬(Wee Teng Wen)’은 싱가포르 UOB은행 CEO 위 이청(Wee Ee Cheong)의 아들이자, 은행 재벌 위 초 야우(Wee Cho Yaw)의 손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금융·경영·심리학을 전공했고, 보스턴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2005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싱가포르에 돌아와 동창인 다니엘 허(Daniel He)와 함께 로앤비홀드 그룹을 설립했습니다.

지금은 약 400명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고, 컨셉 개발팀·운영팀·지원 부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들의 특징적인 운영 방식 중 하나는 유명 셰프나 디자이너, 크리에이터 등을 조인트벤처(JV) 파트너로 참여시켜 공간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운영한다는 점입니다. 브랜드의 자율성과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안정적인 파트너십과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식이죠. 위 텡 웬은 왜 이런 방식으로 싱가포르의 로컬 브랜드를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싱가포르는 젊고, 작고, 외부를 향한 시선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이야기를 지지하고, 지역의 재능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이 작은 섬이 가진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주는 일이 그만큼 더 절실해요.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의 여정은 단순한 공간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다운 라이프스타일을 장소로 번역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글로벌 금융과 교통의 허브로 알려진 만큼, 정작 이 도시 고유의 생활문화와 감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위 텡 웬은 싱가포르 사람들조차 해외의 브랜드와 수입된 문화에 더 큰 가치를 두는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말해요. 그래서 ‘싱가포르에도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자랑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그걸 공간이라는 매체를 통해 실현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합니다.

뉴바루 ⓒNew Bahru

뉴바루 프로젝트의 초기부터 로앤비홀드 그룹은 이곳을 단순한 재생 건축이 아닌 싱가포르의 창의성이 응집된 공동 실험실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팀의 이름을 아예 ‘별처럼 화려한 현지팀(Star-studded Singaporean Team)’이라고 붙이고, 싱가포르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파트너들을 한자리에 모았는데요. 건축과 공간 디자인은 로컬 디자인 스튜디오 FARM이 맡았고, 조경은 싱가포르의 기후와 식생을 깊이 이해하는 Humid House, 브랜딩은 오레곤과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OMFGCO, 조명 디자인은 SWITCH, 그리고 공간의 룩앤필(Look & Feel)부터 가구, 놀이터, 경관 조명까지 전반적인 디자인 방향은 Nice Projects가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참여했습니다. 

뉴바루는 전체 부지를 하나의 작은 동네처럼 설계한 것이 특징인데요. 음식, 소매, 예술, 교육, 주거 기능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구조입니다. 단지는 크게 4층 규모의 옛 본관 건물과 그 옆에 자리한 구(舊) 공장 건물 두 동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본관 1~2층은 개방형 상업 공간으로 리모델링되어 카페, 레스토랑, 로컬 숍들이 들어와 있고, 상층부와 별동 건물에는 교육·웰니스 시설과 함께 서비스드 아파트(Serviced Apartments) 형태의 소형 숙박 공간이 들어섰는데요. 중앙의 넓은 예전의 학교 강당은 다용도 이벤트홀로 탈바꿈해 전시, 마켓, 공연이 열리는 공간이 되었고요. 학교 외부의 옛 주차장 부지는 잔디가 깔린 공공 광장으로 바뀌어, 동네 주민들의 행사나 커뮤니티 모임이 자연스럽게 열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기존의 운동장을 공원 겸 놀이터로, 예전의 교실을 새로운 크리에이티브가 자라나는 공간으로 바꿔낸 접근이에요. 단순히 예쁜 건물에 임대를 위한 상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래된 학교가 지니고 있던 ‘배움’과 ‘성장’이라는 정신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셈이죠. Somma의 메뉴를 개발하는 R&D 스튜디오, 도예 공방 The Potters’ Guilt, 놀이 기반 미식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Orange Tree Preschool, 보컬 트레이닝 스튜디오 The Singing Loft (LOFT), 명문 교육기관 줄리아 가브리엘(Julia Gabriel)의 플래그십 방과 후 프로그램 Thrive까지. 이처럼 매장이면서 동시에 체험, 교육, 창작, 실험이 이루어지는 복합공간들을 곳곳에 들어서 있습니다.

뉴바루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OMFGCO

뉴바루가 한동안 조용했던 리버밸리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던 데에는 OMFGCO의 강렬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브랜딩도 큰 역할을 했어요. 뉴바루(New Bahru)라는 이름은 새롭다는 뜻의 영어 New와 말레이어 Bahru를 겹쳐 쓴 표현인데요. 언어를 혼합하는 이 장난스러운 방식은 뉴바루가 가진 ‘하이브리드’ 정체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이 공간의 지향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싱가포르라는 도시가 가진 다문화성, 그리고 일상적으로 언어를 넘나드는 지역의 코드 스위칭(code-switching) 문화를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동시에, 이 공간 역시 계속해서 새로운 관점과 아이디어로 변화하고 확장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이 코드 스위칭의 콘셉트를 이어가기 위해, OMFGCO는 친숙한 핸드 라이팅 폰트를 새롭게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서체인 파보리트(Favorit)와 조화롭게 결합해, 구조적이지만 경직되지 않고, 실용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균형을 만들었죠. 브랜드 마크의 형태는 뉴바루 건물들을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 그리고 옛 강당 건물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아치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되었어요.

특히 뉴바루의 앞글자를 딴 메인 심볼의 N 구조를 사인 시스템의 기본 단위로 확장해, 아이덴티티가 건축 요소와 맞닿도록 설계한 방식이 인상적이에요. 여기에 컬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공간을 탐험하도록 유도하고, 다양한 경험과 문화가 섞이는 지점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는데요. 결과적으로 이 브랜딩 시스템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유연하고, 기억에 남으면서도 계속 변화 가능한 구조가 되었는데요. 늘 새로운 생각과 실험이 오가는 목적지, 늘 ‘업데이트 중인 공간’, 바로 뉴바루(New Bahru)의 정체성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뉴바루의 그래픽 ⓒOMFGCO
횡단보도 디자인 ⓒOMFGCO
사이니지 겸 벤치 디자인 ⓒOMFGCO

뉴바루의 또 다른 핵심은 서비스드 아파트 ‘알마 하우스(Alma House)‘ 입니다. 복합시설을 개발할 때에 호텔이나 아파트를 포함하는 방식이 새로운 건 아니지만, 알마 하우스가 뉴바루에 입점해있는 로컬 브랜드들과 관계맺는 방식은 꽤나 흥미로운데요. 약 80실 규모의 이 숙소는 단기 여행객은 물론 최대 6개월까지 머무는 장기 체류자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어요. 객실에는 주방, 세탁기·건조기, 냉장고 등 실제 집과 유사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단순한 숙박을 넘어 ‘살아보는 방식의 체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 기존 호텔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인 알마 하우스(Alma House)는 라틴어 Alma Mater에서 가져온 표현으로, ‘영혼을 보살피는 어머니’, ‘배움의 터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옛 학교 건물을 개조해 만든 공간이라는 점과 연결되며, 과거 학교가 지녔던 ‘배움, 성장, 실험’의 기능을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확장한다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어요. 

알마 하우스의 가장 큰 특징은 뉴바루 전체를 하나의 생활형 리조트(Lifestyle Resort)처럼 활용하도록 설계된 구조예요. 일반적인 호텔처럼 내부에 레스토랑이나 스파, 피트니스 시설을 넣기보다, 클러스터에 입점해 있는 로컬 브랜드들과 연결해서 숙박 경험을 확장한 방식이에요. 예를 들어 호텔 내부에 별도의 카페나 다이닝 공간은 없지만, PPP Coffee의 페이스트리와 커피로 구성된 조식 패키지가 객실 앞까지 배달되고, HuevosFico 같은 레스토랑 메뉴도 룸서비스처럼 주문할 수 있어요. 이렇게 뉴바루 클러스터 전체를 하나의 ‘F&B 에코시스템’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에요.

알마 하우스의 객실 ⓒFARM
가구 브랜드와 협업한 알마 하우스의 로비 라운지 ⓒFARM

웰니스 또한 같은 구조로 연결됩니다. 싱가포르의 웰니스 전문기업 Trapeze Group이 운영하는 스파 & 목욕 시설 Hideaway, 24시간 피트니스 짐 Mobilus, 필라테스 스튜디오 Off Duty Pilates, 개인 트레이닝 센터 SuRge 등과 협력해, 알마하우스 투숙객에게 웰니스 프로그램, 무료 체험 데이 패스, 전용 초대권, 할인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어요. 머무는 동안 운동, 휴식, 회복, 학습 등의 프로그램을 자연스럽게 체험하도록 설계된 점이 특징입니다 .

객실 또한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로컬 브랜드의 쇼룸’처럼 구성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무인양품이 운영하는 MUJI 호텔과 유사한 방식이지만, 알마하우스는 로컬 브랜드를 중심으로 ‘쇼룸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구현한다는 점이 차이점이에요. 욕실 어메니티는 클러스터 입점 브랜드인 Omno, 객실과 로비의 가구는 싱가포르 가구 브랜드 Castlery의 컬렉션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즌마다 소품을 교체하면서 공간 분위기를 바꾸고 있는데요. 투숙객은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으면 뉴바루에 있는 Castlery의 매장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편집숍, 키즈 실내놀이터 등 뉴바루에 입점한 수십개의 브랜드와의 제휴를 통해, 투숙객은 체크인 시 전용 혜택 리스트와 함께 뉴바루 활용 안내 가이드를 제공받게 됩니다. 장기 체류자의 경우, 숙박 패키지에 스파 세션이나 피트니스 클래스, 레스토랑 코스요리 등을 조합해서 예약할 수도 있어요. 그야말로 뉴바루 전체를 하나의 생활형 리조트처럼 활용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뉴바루의 창업자 위 텡 웬은 이러한 운영 방식과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는 발견이 일상이 되는 라이프스타일 목적지를 만들고 있어요.

획일적인 몰(mall)의 일상성과는 다른, 정성스럽게 복원된 학교 건물에서 사람들은 계획 없이 찾아와도 하루 종일 머물며 걷고, 제품과 사람, 그리고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고 돌아가죠.

싱가포르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고, 여행자들이 돌아가서 이야기하게 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로컬 크리에이티브의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게 되는 공간 말이에요.”

알마하우스는 로앤비홀드 그룹이 뉴바루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서비스드 레지던스 기반의 장기 체류형 호스피탈리티 모델입니다. ‘호텔’과 ‘주거’의 경계를 넘어서 클러스터 전체와 연결된 생활형 숙박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도시형 호스피탈리티와 로컬 크리에이티브 생태계 모델의 중요한 레퍼런스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뉴바루 ⓒFinbarr Fallon

뉴바루 프로젝트는 단지 폐교를 재생해 만든 복합공간이라는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 도시 안에서 창의성과 실험, 관계 맺기의 방식을 다시 상상해보자는 제안입니다. 과거 운동장이 아이들이 뛰고 놀며 배우고, 서로를 알아가던 열린 공간이었다면, 뉴바루는 오늘의 도시에서 그런 역할을 다시 수행하려고 시도하는 첫 번째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어요.

이때 중요한 것은 공간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공간이 ‘살아 있는지’가 아닐까요. 로앤비홀드라는 이름은 ‘보라, 그리고 놀라라(Lo & Behold)’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지역의 가능성과 사람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주목하게 만들겠다는 의지죠. 뉴바루(New Bahru) 의 이름 역시 영어와 말레이어를 겹쳐 쓴 ‘새로운’이라는 중첩된 의미처럼, 이곳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오래된 것을 새롭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지역의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를 상징해요.

로컬과 지역이라는 생태계는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고, 복잡하고, 난이도가 높은 영역입니다. 단지 상점을 모아놓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과 관계, 신뢰와 실험 같은 정성적인 요소가 축적되어야 비로소 살아 있는 생태계가 된다는 뜻이에요.

특히 AI 기술의 발전으로 디지털 이미지와 정보의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워진 지금, 오히려 오프라인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감각,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 있는 경험을 나누는 일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장소는 왜 필요할까요? 그리고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새로운 공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실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역에 이런 공간이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상업 개발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우리 도시가 새로운 운동장을 갖게 되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용기와,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포용력이 아닐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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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하게 하는 일

비옥하게 하는 일

누군가는 비옥함을 흙이 만들어내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는 겨울의 밭에서는, 사실 수많은 미생물과 뿌리의 잔해가 뒤섞이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고 있지요. 우리는 그 과정을 볼 수 없지만, 그 안에는 돌봄과 기다림이 있습니다. 일상을 윤기있게 만드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의 틈새에서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 불완전하지만 성실한 일의 반복, 잊지 않고 인사하는 습관 같은 것들이 우리를 조금씩 풍요롭게 만듭니다. 비옥하다는 건 단지 결과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쌓이는 온기와 밀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가 사는 동네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호텔, ‘소일 니혼바시 호텔(SOIL Nihonbashi Hotel)’를 소개합니다.

소일 니혼바시 호텔 ⓒKiyoaki Takeda

‘체크아웃할 때 이미 동네의 좋은 이웃이 된다’ 를 컨셉으로 하는 ‘소일 니혼바시 호텔(SOIL Nihonbashi Hotel)’‘SOIL’ 이라는 이름으로 니혼바시 지역에 만들어진 4번째 거점입니다. 소일 니혼바시는 도쿄 니혼바시 지역에 자리잡은 ‘분산형 로컬 복합시설’을 일컫는 이름인데요. 하나의 큰 건물에 집약된 복합시설이 아니라, 여러 개의 작은 건물로 나누어 지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형태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2022년 1월 첫 번째 거점 ‘소일 니혼바시(SOIL Work Nihonbashi 1st)’를 시작으로, 2023년 11월 두 번째 거점, 2024년 초 세 번째 거점을 열었고, 2025년 9월에는 이 모든 거점을 잇는 중심인 소일 니혼바시 호텔(SOIL Nihonbashi Hotel)을 오픈했습니다.

흙이나 토양을 뜻하는 ‘SOIL’은 ‘로컬의 뿌리는 흙(soil)에서 발견된다’를 모토로,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거점을 자처하고 있는데요. 말 그대로 지방과 도시가 결국에는 하나의 땅, 하나의 흙으로 연결되어 있고, 멀리 떨어져있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 더 나아가 여행으로 온 사람들도 결국 동료이자 이웃이라는 관점을 일깨워주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에도시대 전국 각지의 지역 문화가 모이던 니혼바시 지역의 역사를 현대적으로 되살려, 도시와 지역을 잇는 거점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빠르게 재개발되는 도쿄에서 지역 고유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오랜 상인 문화가 남아있고 전국 각지와 연고가 깊은 니혼바시의 지역적인 이야기에 주목한 것인데요. 

소일 니혼바시 프로젝트의 거점들 ⓒSOIL

소일 니혼바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주식회사 스테이플(Staple)’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테이플은 원래 ‘인시투(Insitu)’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2020년, 니혼바시 가부토초에 개장한 마이크로 복합시설K5 호텔’을 통해 처음 이름을 알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금융가 사이에 낡은 빌딩이 늘어서 있던 업무 거리였지만, K5는 그곳을 완전히 다른 장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도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여행코스가 되었고, 부동산 업계에서는 소규모 거점 개발의 사례로 주목받았습니다.

스테이플은 스스로를 소프트 디벨로퍼의 정의한다 ⓒStaple
소프트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 소프트 디벨로퍼의 역할 ⓒStaple
스테이플은 로컬이 되어가는 과정을 4단계로 바라본다 ⓒStaple

스테이플은 자신들을 ‘소프트 디벨로퍼(Soft Developer)’라고 부릅니다. 인구가 줄고, 재난이 잦아지고, 이웃 간의 관계가 느슨해진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회사인데요. 이들은 지역을 이루는 사람들을 독특한 관점으로 읽어냅니다.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은 물론, 여행자나 일시적으로 머무는 사람, 단골처럼 드나드는 손님까지 모두 잠재적인 지역 주민(Potential Local)으로 바라보는데요. 도시를 방문한 사람이 그 분위기에 매료되어 새로운 지역 주민(New Local)이 되고, 이 여러 층위의 이웃들이 결국 고향을 매개로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스테이플이 말하는 진짜 동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요소를 ‘소프트 인프라(Soft Infrastructure)’라고 부르고, 그 소프트 인프라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자신들을 ‘소프트 디벨로퍼’로 정의합니다. 스테이플의 창업자 오카 유타(Yuta Oka)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도보 20분 이내의 ‘이웃 동네’를 지역 만들기의 무대로 삼고, 그 지역의 의식주를 체현하는 호텔이나 ‘거리의 거실’이 되는 다양한 시설을 통해 지역에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토양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지역에 더 많은 사람이 관계 맺을 계기를 만들면서, 우리 자신도 생활인으로서 같은 지역에 장기적으로 관여하고 함께 성장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단단한 철학 아래에서 2021년 탄생한 것이 소일의 첫번째 프로젝트 ‘소일 세토다(SOIL Setoda)’ 입니다.  

소일 세토다 ⓒTaro Masuda

2019년, 오노미치 시와 지역 DMO의 지원 아래 지역 주민들과의 워크숍을 거쳐 2021년 문을 연 ‘소일 세토다(SOIL Setoda)’는 소일 니혼바시의 부모격인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한 곳은 ‘시오마치 기획(しおまち企画)’이라는 회사인데요. 2019년에 설립된 스테이플(Staple)의 자회사로, 스스로를 세토다 지역 경제의 회복을 위해 일하는 지역 상사라고 소개합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작고 지속적인 프로젝트를 실행해온 로컬 기획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오마치 기획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스테이플(Staple)의 대표 오카 유타(Yuta Oka)의 독특한 이력이 있습니다. 2018년 스테이플을 설립하기 전 그는 아시아와 북미에서 프라이빗 에쿼티(PE) 분야의 커리어를 쌓았고, 그 과정에서 글로벌 리조트 그룹 ‘아만(Aman)’의 오너와 경영진에게 부동산 투자 및 자산 전략을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시기에 만난 사람이 바로 아만의 창업자 아드리안 제차(Adrian Zecha), 그리고 1999년부터 아만에 몸담으며 아만 도쿄(Aman Tokyo) 프로젝트를 이끈 하야세 후미토모(Fumitomo Hayase)였습니다. 이 두 사람과의 인연은 곧 하나의 결실로 이어지는데요. 2017년, 오카 유타와 하야세는 함께 나루 디벨롭먼츠(Naru Developments)라는 호텔 개발-운영 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아드리안 제차와 함께 일본 료칸 브랜드 Azumi(아즈미)를 개발하게 됩니다. 아즈미의 첫 지점이 바로 세토다였고, 단순히 호텔을 짓는 것을 넘어 마을 전체를 살리자는 생각에서 오카 유타가 구상하게 된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바로 소일 세토다(SOIL Setoda)입니다. 아즈미가 보여주는 숙박의 깊이에, 더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교류할 수 있는 마을의 거실 같은 공간을 더하고 싶었던 거죠.

아즈미 세토다 ⓒAzumi Setoda

세토다는 아름다운 섬들과 레몬 재배로 유명한 마을입니다. 하지만 여행객의 체류 시간이 짧고, 지역 경제와의 연결도 미약한 편이었어요. 이러한 배경에서 가볍게 머물 수 있는 숙소라던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지역에 꼭 필요한 ‘소프트 인프라’로 떠오르게 됩니다. ‘지역의 매력을 체험할 수 있는 마을의 거실’이라는 콘셉트 아래, 소일 세토다는 숙박, 식음, 관광 안내, 업무 공간이 결합된 복합 문화 거점으로 개발되었습니다. 단순한 소비형 관광이 아니라, 한 번쯤 그 동네에서 살아보는 듯한 경험을 주는 공간이 되는 것이죠. ‘숙소 안에 틀어박히기 보다는, 모르는 동네 어르신과 나란히 앉아 현지 식당에서 밥 한 끼를 즐기는 여행’을 상상했다는 오카 유타의 말처럼, 스테이플이 추구하는 소프트 디벨로퍼로서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든 공간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 주민에게는 생활의 일부가 되고, 방문객에게는 다시 돌아오고 싶은 경험을 주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철학은 고스란히 도쿄 니혼바시로 이어집니다.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소일 니혼바시는 세토다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방문자를 넓은 의미의 지역 주민(New Local)으로 받아들이는 포용력, 두번째는 이미 동네를 가꾸고 있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파트너십, 그리고 세번째는 지역을 하나의 브랜드처럼 바라보며 새로운 매력을 발굴하는 섬세한 감각입니다. 세토다에서 실험했던 방식은 이후 니혼바시라는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와서, 또 하나의 흙에 뿌리내리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소일 니혼바시 첫번째 거점에 있는 파크렛 베이커리 ⓒStaple
소일 니혼바시 두번째 거점에 있는 딤섬 전문점 ⓒStaple
소일 니혼바시 호텔에 있는 피자 레스토랑 ⓒStaple

소일 니혼바시(SOIL Nihonbashi)라는 이름 그대로 흙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랜드마크 건물을 짓는 대신, 동네 곳곳에 작은 거점들을 퍼뜨리며 지역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 시작은 공원 옆 작은 빌딩 1층에 열린 코워킹 공간 소일 워크 (SOIL Work)와 베이커리 카페 파크렛 베이커리(Parklet Bakery)였죠.

SOIL의 첫번째 지점이 오픈하기까지는 꽤 흥미로운 배경이 있었습니다. 기획사인 스테이플은 대형 디벨로퍼인 미쓰비시 지쇼(Mitsubishi Estate)와의 협업을 통해 기존 사무용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SOIL 거점을 만들었는데요. 통상적인 개발 방식처럼 단순히 공간을 빌려 쓰는 모델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께 운영 방향을 설정하고 공간 구성과 큐레이션을 공유한 케이스였어요. 지역 커뮤니티나 로컬 경제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지, 한 공간이 어떻게 그 동네의 결을 바꾸는지를 함께 고민했다는 점에서 기존 부동산 개발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1층의 파크렛 베이커리(Parklet Bakery)는 스테이플이 추구하는 커뮤니티의 감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 같은 곳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베이커리 타르틴(Tartine) 출신의 제빵사 미야자키 요코, 도쿄와 해외에서 내추럴 와인 바와 레스토랑을 운영한그의 파트너 마쓰야마 타카히로. 두 사람 모두 상업적 확장보다는 사람과 재료, 그리고 동네의 결에 집중하는 태도로 일관해왔고, 그 진정성이 SOIL과 잘 맞아 떨어졌죠.

 

공유오피스 브랜드 소일 워크 ⓒStaple

특히 소일 워크(SOIL Work)를 통해 보여주는 진정성있는 파트너십이 인상적인데요. 소일 워크는 ‘미래를 향한 흙일’을 컨셉으로, 경제적 자본의 성장뿐만 아니라 문화적·자연환경적 자본의 극대화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협동 오피스입니다. 이곳은 ‘입주자 = 고객’이라는 일반적인 공유 오피스가 아니라, ‘입주자 = 공동 운영자’로서 서로의 관계와 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가는 공간인데요. 현재까지 니혼바시에 세 개의 거점을 두고 있는데, 입주한 기업과 브랜드들은 공간을 단순히 사무실로 쓰지 않습니다. 입주사를 선정할 때도 Staple은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어요. ‘대기업이냐 스타트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브랜드는 이 동네와 어울릴까?’,’이 사람들이 이 거점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 각자의 업종은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지역성, 지속가능성, 관계의 진정성 같은 키워드를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실제로 소일 워크에 입주해 있는 기업들을 보면 그 철학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낫어호텔(NOT A HOTEL)은 ‘집이자 호텔’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며, 지역 자원을 활용한 스몰 럭셔리 숙소를 전국에 전개하고 있는데요. 소일 워크에는 스테이플과 낫어호텔이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낫어호텔 매니지먼트(NOT A HOTEL MANAGEMENT)가 입주해 있는데, 이들은 전국 각지의 스몰 럭셔리 호텔 운영을 함께 추진하고 있습니다. 도쿄 시부야에서 시작된 부티크 호텔 브랜드 트렁크(TRUNK)도 입주해있는데, 지역사회와 공존하는 호텔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SOIL과 맥을 같이 하고 있죠. 이외에도 ANA 그룹이 운영하는 지역 특산품 편집숍 토치도치(TOCHI-DOCHI), ‘지역의 풍요로움을 업데이트한다’는 미션 아래 지역 공동체와 협업하여 새로운 사업과 교육·관광 등을 일구는 마을 만들기 회사 파운딩 베이스(Founding Base), 글로벌 호스피탈리티 기업인 반얀트리(Banyan Tree) 그룹이 일본 오키나와에 선보인 럭셔리 리조트 브랜드 유미하(YUMIHA)까지. 각자의 영역에서 ‘로컬’이라는 키워드를 실천하고 있는 기업들이 소일 워크와 함께 동네를 채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니혼바시 닌교초의 주분 문화 ⓒGQ Japan
니혼바시 닌교초의 거리 풍경 ⓒSOIL
소일 니혼바시 호텔의 1층 풍경 ⓒKiyoaki Takeda

세토다에서 출발한 여정 끝에 비로소 2025년, 소일 니혼바시 호텔(SOIL Nihonbashi Hotel)이 문을 열었습니다. 총 14실 규모의 이 작은 호텔은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지금까지 소개한 코워킹 스페이스와 레스토랑, 카페와 골목을 하나로 잇는 허브입니다. 

1층에는 피자 레스토랑 피자 타네(Pizza Tane)는 파크렛 베이커리에서 만든 사워도우로 피자를 구워냅니다. 이름 속 ‘Tane(種)’는 일본어로 씨앗이라는 뜻인데요, 동네에서 키워낸 발효종의 씨앗을 받아와 다시 다른 방식으로 꽃피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층부터 5층까지 더블과 퀸 사이즈의 객실, 그리고 복층형 스위트룸까지 다양한 유형의 방이 준비되어 있고요. 식물을 테마로 한 인테리어, 천연 소재의 어메니티, 일부 객실에 마련된 반신욕 가능한 욕조까지, 도심 속에서도 깊게 쉴 수 있는 환경을 갖췄습니다. 옥상 팜가든, 공원 옆 테라스도 투숙객에게 열려 있어, 잠시 산책 나서듯 동네를 걸으며 소일의 각 거점에 있는 파크렛 베이커리, 팀섬(timsum), 오버뷰 커피(Overview Coffee)를 둘러보며 동네와 친해지는 시간이 이 호텔의 핵심 경험이 되죠.

건축은 ‘골목 뒤뜰 원예(路地裏園芸)’라는 컨셉으로 쿠마 켄고(Kengo Kuma Associates) 출신의 타케다 키요아키 건축설계사무소(Kiyoaki Takeda Architects)가 디자인했습니다. 니혼바시 닌교초 골목골목마다 이웃들이 손수 키운 화분들이 놓여 있는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호텔 전체를 작은 골목 정원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시공 중에는 인근 주민들이 맡긴 화분들을 건물 곳곳에 배치해, 단순한 장식이 아닌 지역과의 교류 그 자체가 되도록 했고요. 어린이공원과 연결된 1층 정원은 투숙객이 흙과 식물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호텔이 문을 연 뒤, 동네 이웃들이 가져다 준 화분 100여 종이 호텔 곳곳에 자리잡았고, 그 덕분에 이 건물은 건축 자재로만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동네와 함께 천천히 자라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객실의 풍경 ⓒKiyoaki Takeda
객실의 풍경 ⓒGQ Japan

누마타(沼田)씨는 프랑스에서 요리사로 일한 뒤, 도쿄에서 커피숍 오픈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데요. 그 후 여행 중 들른 이쿠치섬(生口島)의 매력에 이끌려 아즈미 세토다(Azumi Setoda)의 서비스 스태프로 합류했고, 현재는 스테이플의 F&B 부문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소일 니혼바시 호텔을 기획하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스태프들 역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경험해 온 ‘도시 속으로 뛰어드는 여행자의 감각’을 호텔의 서비스나 디자인에 녹여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편안함을 느꼈던 호텔 다이닝의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서비스라든가, 도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대화 같은 것들. 또, 객실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도 중요하죠.”

아주 단적인 사례지만, 소일 니혼바시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단순한 호텔리어가 아닙니다. 근처 가게를 소개하고, 동네 이야기를 나누며, 손님이 이웃이 되어 체크아웃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지역과 연결되고 일상과 섞이는 체류 방식을 제안하는 건데요. 호텔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공간들은 단 하나의 목적이 아닌, 다양한 감각이 공존하는, 말그대로 ‘풍요로운 토양(SOIL)’처럼 작동하는 셈입니다. 

파크렛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빵 ⓒMax Houtzager

이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세 가지 단어가 보입니다. 바로 ‘발효’, ‘공유’, 그리고 ‘공동체’. 천연 발효종으로 구운 사워도우 피자, 매일 아침 이웃이 돌보는 화분들, 동네 가게와의 긴밀한 협업까지—모두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천천히 스며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화롭게 반응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모여 자연스레 감도를 형성해가는 이 원리는, SOIL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이 프로젝트는 ‘어느 하나만을 위한 공간은 금방 고갈되지만, 섞이고 발효되는 장소는 지속적으로 풍요로워진다’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동네는 얼마나 비옥할까요? 나의 주변은 무엇과 섞이고, 누구와 발효되고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이 흙 위에서,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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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여는 철로

관계를 여는 철로

sd기차에 앉아 있다보면 머릿속이 차분히 정리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것에서 느껴지는 묘한 여유의 감각이랄까요.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과 마을, 길게 늘어진 강줄기를 바라보다 보면 늘 붙잡고 있던 생각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풀리기도 하는데요. 상자 밖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주에는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헌터 뱅크(Hunter Bank) 소개합니다.

사냥을 떠나는 헌터 뱅크 ⓒHunter Bank

헌터 뱅크(Hunter Bank) 프로젝트는 일본 오다큐 전철 주식회사가 지역사회의 조수(鳥獣)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기획한 혁신적인 사냥꾼 매칭 서비스입니다. 일본에서는 멧돼지, 사슴, 원숭이 등의 야생동물이 농작물을 파괴하는 피해가 연간 158억 엔에 달하는데요. 전국 시정촌의 약 90%에서 조수 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잡아낼 지역의 헌터(수렵인)들은 고령화로 빠르게 감소하여, 머지않아 수렵 인력 부족이 심각해질 전망입니다. 이에 오다큐 전철은 젊은 수렵 희망자들을 육성함으로써 향후 지역의 유해동물 피해를 줄일 방안을 모색했고, 그 해결책으로 헌터 뱅크가 탄생한 것인데요. 오다큐 전철에서 헌터 뱅크를 담당하는 아리타 카즈타카(有田一貴)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실 철도회사가 지역 과제 해결에 나서는 것은 지금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 한큐전철이 연선 개발을 위해 다카라즈카 가극을 만들었듯, 1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철도업의 문화입니다” 

헌터 뱅크 프로젝트는 사내 공모를 통해 제안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젊은 직원이 ‘사슴과 멧돼지가 증가해 산의 생태계가 황폐화된다’는 문제를 접한 것이 계기였고, 여기에 더해 오다큐 철도 노선 자체도 야생동물과 충돌해 열차 운행이 지연되는 일을 겪으면서 이 문제를 회사 차원에서도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요. 오다큐 전철은 이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신규 사업 아이디어로 채택하여 2020년 시범사업을 거친 후, 2022년 정식 사업화하였습니다. 요컨대 헌터 뱅크의 목적은, 사냥에 관심은 있지만 실행 기회가 없던 잠재적인 헌터(이른바 ‘페이퍼 헌터’)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그들을 유해동물 피해로 고심하는 농가와 연결하여, 지역의 조수 피해를 줄이고 생태계와 지역 농업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터 뱅크의 사업구조 ⓒHunter Bank

헌터 뱅크는 2020년 8월부터 2021년 9월까지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서 처음 실증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약 50명의 헌터가 참여하여 멧돼지 31마리를 포획, 시범적으로 성과를 입증했는데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22년 6월 일반인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시작해서, 현재 오다와라시를 비롯해 야마나시현 고스게촌, 도쿄도 하치오지시, 지바현 후쓰시, 사이타마현 요코제정, 교토부 아야베시 등 여러 지역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사업 초기에는 오다큐 전철이 오다와라시에서 직접 운영을 주도했으나, 2024년부터는 지역별 공동 운영 파트너를 모집하여 일본 전국으로 전개를 가속화하고 있는데요. 헌터 뱅크 프로젝트의 주요 참여 주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오다큐 전철 주식회사
    프로젝트 기획 및 운영 주체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여 사업을 총괄합니다. 사내에 디지털사업창조부를 중심으로 프로젝트팀이 구성되어 있으며, 유해동물 포획 전문가 등 야생동물 피해 대책 전문가들도 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지방자치단체
    오다와라시와는 사업 초기부터 공공·민간 협력(PPP) 형태로 협약을 맺어 협력하고 있고, 이후 다른 지자체들과도 연계하여 현지 농가 소개, 행정적 지원 등을 받고 있는데요. 오다와라시는 헌터 뱅크와 ‘조수 피해 대책 추진에 관한 협정’까지 체결하며 적극 협력하고 있습니다. 

  • 지역 농가 및 임업 종사자
    유해조수로 피해를 입는 농림업자들이 토지 제공 및 덫 설치 협조, 미끼 놓기 등으로 참여합니다. 헌터 뱅크는 이들과 수렵 참가자를 매칭하여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 헌터 (회원)
    수렵에 관심이 있거나 수렵면허를 가지고도 기회를 못 찾던 일반인 회원들이 핵심 참여자입니다. 이들은 헌터 뱅크에 회원을 등록한 뒤 주말 등에 프로그램에 참여해 실제 포획과 해체를 경험하는데요. 2023년 시점까지 누적 회원 수는 500명을 넘겼고, 10~40대의 젊은층 중심으로 회원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헌터 뱅크 프로그램의 참가자들 ⓒHunter Bank

헌터 뱅크에서 회원 헌터들과 피해 농가를 팀으로 매칭하면, 매칭된 팀은 포획 절차를 역할 분담하여 수행하게 됩니다. 헌터 뱅크의 헌터들은 주말에 현지에 내려가 덫 설치와 포획 작업을 하고, 평일에는 현지 농가가 덫 주변에 미끼를 놓거나 순찰하며 협력합니다. 덫에 짐승이 걸리면 주말에 현장에 달려가 최종 포획을 수행하고, 이후 전리품인 고기를 함께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인상적인 건 헌터 뱅크의 운영 방식입니다. 경험이 없는 초보자도 쉽고 안전하게 수렵에 입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데요. 먼저 참가 희망자는 월 8,000엔의 구독료를 내고 회원으로 가입해야 합니다. 회비에는 수렵에 필요한 대부분의 준비물(박스덫, 작살, 해체 도구 등)의 대여와 상해보험 가입, 그리고 전문가의 교육 서비스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초심자들이 비싼 장비 구매나 복잡한 준비 없이도 바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사냥에 대한 접근성을 낮춘 점이 특징인데요. 거기에 더해 ‘스마트 헌팅’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회원들이 스마트폰 앱을 통해 산에 가지 않고도 트레일캠(자동센서 카메라)로 덫 주변 상황을 확인하고, 온라인으로 농가와 헌터가 소통하고, 일정을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는 헌터들도 굳이 매일 산에 가지 않고도 수렵활동을 지속할 수 있고, 농가 입장에서도 번거로운 작업 지시를 편리하고 정확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요. 생업이 걸려 있는 농가의 입장과 부업 내지는 취미 생활로서 헌터 뱅크에 참여하는 회원 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를 좁히는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생각됩니다. 

헌터 뱅크 프로그램의 참가자들 ⓒHunter Bank

얼핏 거대한 기업에서 하는 작은 사회 사업으로 보일 수도 있고, 사냥이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문화로서의 인식,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던가 동물권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수 있는 지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터 뱅크 프로젝트에서 주목할만한 건 ‘확장 가능한 관계’를 고안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굿 디자인 어워드(Good Design Award)는 2023년에 헌터 뱅크를 베스트 100에 선정하면서 ‘지속적으로 헌터를 육성·배출함으로써 조수 피해를 저감하려는 훌륭한 시스템 디자인’ 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무엇보다 지역의 농가와 사냥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을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주체는 반드시 오다큐 전철일 필요도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자체에서 직접 사업화할 수도 있고, 사냥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새로운 레저 활동을 원하는 젊은 층의 고객이 많이 이용하는 IT 플랫폼이 할 수도 있습니다. 각 지역마다 피해의 정도나 형태, 농가의 규모나 농작물의 종류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각지에 맞는 변형된 헌터 뱅크들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요. 더 나아가서는 ‘사냥’이 아니라 지역이 처한 다른 이슈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사냥이라는 수단이 아니라,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두 가지 별개의 문제를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하고, 서로의 필요를 몰랐던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언제나 관계의 설계에서 탄생하는 바로 그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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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것들에 대한 찬미

주어진 것들에 대한 찬미

매일 아침마다 걷는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차이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일정한 리듬으로 드리우는 가로수의 그림자, 늘 붐비는 거리에서 불쑥 들려오는 웃음소리, 오래 본 듯 낯선 표정으로 서 있는 이웃의 모습까지. 익숙한 풍경은 한 걸음만 물러서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요. 햇살은 그저 빛이 아니라 계절의 각도를 알려주고, 가족과 친구와의 대화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서로를 이어주는 최소한의 약속이 됩니다.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사실은 오늘을 지탱하는 단서였음을 깨닫는 순간, 평범한 하루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미 거기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보는 눈만 있다면 일상은 끊임없이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처럼요.

이번 주에는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는 브랜드 손모(Sonmo) 소개합니다.

손모의 시그니처 제품인 올리브유 ⓒStephanie Stamatis

손모(Sonmo) 프로젝트는 스페인 마요르카 섬 발데모사(Valldemossa) 지역에 위치한 역사적인 산악 농장 손 모라게스(Son Moragues)를 재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는 유서 깊은 농장의 토지와 전통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복원하고 현대에 맞게 되살리는 것인데요. 500년이 넘은 농장 부지를 재생함으로써, 과거 두 세기 전의 생활방식 – 즉 지역 땅이 주는 자원에 기반해 자급자족하고 장인 정신이 깃든 삶 –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모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손 모라구에스 농장은 마요르카 북서부 트라문타나(Tramuntana) 산맥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한데요. 농장은 발데모사 마을 외곽 해발 고지에 자리한 400헥타르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에 올리브 과수원, 과수밭, 천연림 등이 펼쳐져 있습니다. 특히 약 80헥타르 규모의 계단식 밭에는 고대 올리브나무 10,0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들 중 일부는 수령 700년 이상으로 추정될 정도로 유서가 깊은데요. 이러한 계단식 올리브 밭과 더불어 산속 담수 저장 탱크와 산책로 등 전통적인 경관 요소가 농장 곳곳에 남아 있는데, 손모 프로젝트를 통해 이러한 역사적 경관도 함께 복원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 농장은 19세기에는 오스트리아 대공 루이스 살바도르(Luis Salvador)의 별장으로도 쓰였던 곳으로, 산 중턱에 그가 이용하던 전망용 산장(Refugio)이 남아 있어 생활문화사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한데요. 그렇기 때문에 손모는 단순한 보존 사업이 아니라 농업-공예-관광이 결합된 복합적인 재생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 모라게스의 농장 풍경 ⓒSonmo

약 15년간 단계적으로 추진되는 손모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크게 4개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1. 유기농 올리브 재배 및 생산
    농장의 주력 생산품은 유기농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로, 전통적인 마요르끼나(Mallorquina) 품종만을 사용해 연간 약 12,000리터의 올리브유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손 모라게스는 마요르카 고유 품종으로만 100% 생산되는 유일한 올리브유인데요. 이밖에도 농장 내 과수원과 채소밭에서 재배한 유기농 농산물로 수제 잼, 마멀레이드, 피클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2. 전통 수공예 품목 개발
    농장에서 얻은 자원으로 수공예 제품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농장에 자생하는 양떼에서 채취한 양털을 과거 마요르카 섬의 전통 기법을 되살려 담요와 러그 등 직조 섬유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요. 이를 위해 1960년대 이후 방치되었던 마요르카의 구식 방직기들을 인수하여 영국의 직조 장인 다니엘 해리스(Daniel Harris)런던 클로스 컴퍼니(London Cloth Company)와의 협업을 통해 현대적인 방식으로 복원했습니다. 복원된 19세기 직조기계를 활용해 2023년부터는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마요르카산 양모 담요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2024년에는 전통 문양을 살린 직조 러그와 직물 컬렉션도 선보였는데요. 또한 농장 내 흙, 돌, 식물의 재를 활용한 공방을 운영하면서 식기, 장식품 등의 세라믹 제품을 제작합니다. 특히 올리브 나무를 비롯한 지역 목재의 재를 유약으로 사용해 개발한 제품들이 인상적인데요. 손 모라게스의 토질과 올리브 씨앗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색감과 질감이 특징입니다.
  3. 체험 관광 및 교육 프로그램 
    단순히 제품 생산에 그치지 않고 농장의 체험 관광을 통해 전통과 가치를 공유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땅과 일, 트라문타나에서의 삶의 방식을 사람들과 나눈다’는 컨셉으로 올리브유 테이스팅 워크숍, 올리브 숲 속 피크닉, 농장의 역사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해설 프로그램, 산악 하이킹과 루이스 살바도르의 산장(Refugio) 투어 및 시식 이벤트 등 다양한 농장 체험 상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4. 판매 및 브랜드 운영
    손모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발데모사 마을의 작은 상점과 마요르카 수도 팔마(Palma) 도심에 있는 직영 오프라인 매장,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판매되고 있습니다. 올리브유는 300년 전통의 마요르카 유리 공방 고르디올라(Gordiola)가 직접 손으로 불어서 만드는 아름다운 유리병에 담겨 판매되고, 손모의 공예품들은 한정판 컬렉션 형식으로 소개되어 특히 수집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농장에서 나오는 상품 판매 수익을 통해 재생 및 복원 프로젝트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함과 동시에, 마요르카의 장인 정신과 슬로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독자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올리브 숲 속 피크닉 프로그램 ⓒSasha Personick
농장 투어 프로그램 ⓒSasha Personick
손모의 도자기 공방 ⓒSasha Personick

손모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의 기술과 철학을 바탕으로 협업하고 있습니다. 먼저 손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한 주역은 역시 브루노 엔트레카날레스(Bruno Entrecanales)입니다. 그는 스페인 기업 악시오나(Acciona) 가문의 일원으로 금융업으로 성공을 거둔 뒤 2007년 경 사재를 들여 손 모라구에스 농장을 인수했는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리조트를 개발하는 대신에 역사적인 농장을 되살리는 데 자신의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브루노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주도한 창립자로서, ‘과거의 삶의 방식과 전통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럭셔리’라는 신념을 갖고 손모를 시작했는데요. 그는 마요르카 ‘트라문타나 21(Tramuntana XXI)’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트라문타나 21은 지역의 환경 재생 및 지속가능 발전 계획 수립에 전문성을 제공하고 있는 손 모라구에스 프로젝트의 총괄 주관 단체로, 이를 통해 손모 프로젝트를 단순 개인 사업이 아니라 지역 전체의 지속가능성 운동으로 발전시켰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손모의 운영은 조 홀스(Joe Holles)가 핵심 인물로 참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발데모사에서 자란 조는 손 모라게스에 깊은 애정을 품고 프로젝트에 합류, 현재 혁신 및 지속가능성 디렉터(Director of Innovation & Sustainability) 겸 농장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데요. 그는 올리브 숲 복원과 전통 농업 재활성화의 청사진을 구체화하고, 다양한 제품 개발과 지속가능성 전략을 이끌어온 장본인입니다. 농업 엔지니어에서부터 환경과학자, 마케팅 전문가와 공방의 장인까지 다국적・다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젊고 열정적인 팀을 이끌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방치된 방직기의 부품 ⓒSonmo
방직기의 복원 과정 ⓒSonmo
복원된 방직기로 생산하는 울 제품 ⓒSonmo
손모에서 생산되는 흙과 올리브 나무의 재를 섞어 만든 유약 테스트 ⓒSonmo
손모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제품 ⓒSonmo

공예품의 제조에는 영국의 방직 전문가 다니엘 해리스(Daniel Harris)가 특별한 파트너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런던 클로스 컴퍼니(London Cloth Company)를 운영하며 빅토리아 시대 방직기를 복원해온 장인이자 섬유 역사 연구자입니다. 손모는 그와의 협업을 통해, 방치되었던 마요르카 섬의 구식 직조기 6대를 복원하고, 옛 섬유 공장의 기술을 재현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손모의 텍스타일 부문 책임자인 클라라 비녈(Clara Vignal) 등 섬유 디자이너 팀을 이루어 전통 무늬 디자인과 천연염색 기법을 개발하고, 도자 부문에서는 현지의 세라믹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토속 재료 실험과 제품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지역 장인들과의 협업도 눈에 띄는데요. 현지 유리공방 고르디올라(Gordiola)와 함께 손모에서 생산되는 올리브유를 위한 수제 병을 전통 유리공예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유기농 농업 협회 APAEMA(Associació de Productors d’Agricultura Ecològica de Mallorca)와 환경 컨설팅사 트루월드(TrueWorld), 지속가능성 스타트업 아졸라 프로젝트(Azolla Projects)가 손모의 파트너로 참여하여 유기농 인증, 환경 모니터링, 환경 크레딧 체계 개발 등을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수의 현지 농업인, 장인, 전문가, 기관들이 힘을 합쳐 손모 프로젝트를 성장시켜왔으며, 현재도 100여 명의 장인과 기술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손모에서 재배되는 올리브 ⓒSonmo
손모의 로고 디자인 ⓒSonmo, StudioRoses

손모의 오프라인 매징이 있는 마요르카의 수도 팔마를 베이스로 하는 스튜디오 로지스(StudioRoses)가 디자인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흥미롭습니다. 마치 손 모라게스에서 재배되는 올리브처럼 보이는 점들이 손모(Sonmo)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그래픽 디자인입니다. 각 제품의 패키지로 확장되는 시스템도 인상적인데요. 손모는 2024년 FAD 아트디렉터 및 그래픽 디자이너 협회 (ADG-FAD) 가 수여하는 라우즈 어워즈(Laus Awards)의 그래픽 디자인 및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수상했습니다. 

손모 ⓒSasha Personick

오늘날 트라문타나 산맥의 많은 역사적 영지들은 호텔이나 별장으로 전환되며 관광산업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손모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상업적 개발 대신, 전통 농업의 복원과 생활 문화의 재현에 집중한 것인데요.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장이 아니라, 일종의 ‘유기농 박물관’으로 기능하는 셈입니다. 이를 통해 방문객들은 숙박이나 휴양을 소비하는 대신에 땅과 사람, 단순한 기술이 이어온 오래된 질서의 역사를 직접 경험합니다. 계단식 돌담 위에서 천천히 살아가는 올리브 나무, 재를 유약으로 바꾸는 도공의 실험, 수십 년간 멈춰 있던 직조기를 다시 돌려 얻은 직물은 모두 오래된 땅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가 됩니다. 

손모의 인스타그램에는 ‘Sonmo’의 앞글자를 딴 ‘Satisfaction Of Not Missing Out’ 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흔히 타인과 스스로를 비교해서 뒤쳐지거나 놓칠 것을 두려워하는 ‘FOMO(Fear Of Missing Out)’를 반대로 차용한 것인데요. 직역한다면 ‘무언가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얻는 만족’ 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일상에서의 의미도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재발견에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돌담, 나무, 흙, 그리고 매일의 햇살과 바람까지.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내던 풍경들이 사실은 삶을 지탱하는 본질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합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것들은 여전히 풍요롭고 새로운 의미를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주어진 것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전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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