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없는 장소에서
우리는 늘 어딘가에 간다고 말하지만, 막상 떠올려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그곳의 공기와 빛, 그리고 잠깐 스쳤던 감정들입니다. 돌아와 보면 설명할 수 있는 건 사진이 아니라 풍경과 관계맺는 감각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여행은 방의 크기보다 바람의 온도로 기억되고, 장소는 물리적인 경계가 아니라 관계의 밀도로 느껴지곤 합니다.
어쩌면 머문다는 일은 공간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장소에 머무는 걸까요, 아니면 장소가 우리에게 머무는 걸까요?
이번주에는 새로운 형태의 호텔을 선보이는 ‘제로 부동산(Zero Real Estate)’를 소개합니다.
제로 부동산(Zero Real Estate)은 스위스의 쌍둥이 개념미술가 프랑크 릭린(Frank Riklin)과 파트릭 릭린(Patrik Riklin) 형제, 그리고 호텔 전문가 다니엘 샤르보니에(Daniel Charbonnier)가 공동 기획한 독특한 호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릭린 형제가 2008년 선보인 설치미술 작품 ‘널 슈턴 호텔(Null Stern Hotel)’에서 출발했는데요. ‘널 슈턴’은 독일어로 ‘0성급 호텔(Zero Star Hotel)’이라는 뜻으로, 형제는 호텔의 등급 제도를 풍자하기 위해 지하 핵방공호를 호텔로 개조했습니다. 전통적인 호텔 등급을 결정하는 대리석 바닥, 금박 수전, 넓은 로비와 같은 물리적 자산을 모두 제거해 ‘제로’로 만들었고, 대신 투숙객의 감정과 경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극대화하고자 했는데요.
2009년 스위스에서 단 1년동안 운영된 이 호텔은 창문도 없고 환기도 원활하지 않은 콘크리트 벙커 안에 만들어졌습니다. 투숙객들은 공동 샤워실을 이용했고, 난방이 되지 않는 공간에서 잠을 자야 했죠. 아침 온수는 단 한 명분만 제공되어 추첨으로 순서를 정해야 했고, 침대 배정은 낡은 자전거 바퀴를 돌려 결정되었습니다. 취침 시간마저 투숙객들의 평균 희망 수면 시간을 계산해 정했죠. 일상 속의 예술을 표방한 사회 실험이었지만, 이 열악한 환경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불황에 친숙한 사치(Recession-friendly Luxury)’로 해석되며 미디어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2009년 전 세계 호스피탈리티 산업 혁신상 후보에 오르고, GEO 선정 유럽 100대 호텔에 이름을 올리면서 호텔 업계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포시즌스(Four Seasons)를 거쳐 글로벌 호텔 컨설팅 기업 마인즈 인 모션(Minds in Motion)의 대표를 지낸 다니엘 샤르보니에(Daniel Charbonnier)는 이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감명을 받아 프로젝트에 합류했습니다. 2018년, 널 스턴 호텔 프로젝트는 지하 방공호를 벗어나 스위스 동부 알프스에서 ‘제로 부동산(Zero Real Estate)’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합니다. ‘부동산이 없는(Real Estate-liberated)’ 호텔이라는 개념 아래, 벽과 지붕을 완전히 제거하고 들판 위에 침대만을 놓는 극단적인 형태를 선보이며 전통적인 호텔의 정의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요. 실제로 이 호텔에는 물리적 벽이나 천장이 없고, 침대와 협탁, 스탠드 조명 등 필수 요소만 갖춘 최소한의 공간만 제공됩니다. 이를 통해 투숙객은 자신을 둘러싼 광활한 알프스의 풍광을 객실의 인테리어이자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경험하게 되죠. 공동창립자 샤르보니에는 ‘호텔에 별점을 매기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별을 받는 주체는 호텔이 아니라 고객 자신’이라며, 제로 부동산은 ‘손님을 중심에 놓는 진정한 럭셔리 호텔’이라고 설명합니다.
제로 부동산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호텔과 달리 팝업 호텔 형태로 운영됩니다. 각 객실은 일종의 노천 스위트룸으로, 주로 여름 성수기에만 한시적으로 개설되며, 건물이 없기 때문에 체크인은 인근 관광안내소나 지역 목장에서 진행되는데요. 이 가격에는 개인 버틀러 서비스와 지역 특산품으로 구성된 조식이 포함되어 있어, 투숙객은 야외에서 머물면서도 호텔 수준의 맞춤형 서비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지역 관광청,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운영 방식이에요. 기획자들은 스위스 각 지역의 관광 조직과 협력해 최적의 장소를 발굴하고 객실을 설치합니다. 이를 통해 지역별 특색을 담은 현지에 딱 맞는 제로 부동산이 탄생하죠. 예를 들어 2018년 처음 선보인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역의 객실 3곳은 토겐부르크 관광청이 주도해 기획·운영되었고, 2020년에는 스위스 동부 6개 주와 리히텐슈타인까지 동참해 총 7개의 객실을 분산 운영했습니다.
각 객실에는 해당 지역 출신의 ‘현대판 버틀러’가 배치되어 손님맞이부터 지역 안내, 식사 서비스까지 책임집니다. 버틀러로 선발된 주민들은 사전 교육을 통해 강풍 속 침대를 정돈하거나, 쟁반을 들고 계곡을 건너는 법까지 훈련받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하는데요. 이러한 사업 구조 덕분에 고정 건물 유지비 없이도 수익을 창출하고, 대신에 발생한 수익은 동네 주민을 버틀러로 고용하는 비용과 지역 서비스 구매 등 지역사회에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독특한 컨셉과 입소문으로 예약 경쟁률이 매우 높아 일부 지역의 경우 개장 직후 하루만에 해당 시즌 모든 객실이 매진되었고, 한때 대기자만 9,000명에 달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기존 호텔과 차별화된 제로 부동산의 운영 전략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위스 국가 관광청은 제로 부동산 열풍 이후 전국 50여 곳에 ‘밀리언 스타 호텔(Million Stars Hotel)’이라는 유사한 오픈에어 숙소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했죠.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호텔리어이자 예술가가 되어가는 과정에 보람을 느껴요. 궁극적으로는 세계 각지의 특별한 장소들이 부동산 없는 호텔로 연결되어 새로운 여행 지도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릭린 형제의 이러한 비전은 제로 부동산의 정신이 럭셔리로 소비되는 대자연과 호텔이라는 이름을 벗어나서, 다른 담론과 주제, 장소적인 맥락으로 얼마든지 상상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022년, 리클린 형제와 샤르보니에가 스위스 발레(Valais)주의 사이용(Saillon) 지역에서 선보인 ‘안티 아이딜릭(Anti-idyllic) 스위트’는 이러한 점에서 곱씹어볼 가치가 있어요. 이전까지의 제로 부동산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다면, 이 새로운 스위트는 의도적으로 소음과 공해, 그리고 시각적 불편함이 가득한 주유소 앞에 설치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 전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재, 지금은 편안하게 잠들 때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편하게 잠들게 하는 호텔’이 아니라 ‘불편하게 깨어 있게 하는 호텔’이라는 전위적인 컨셉으로 만들었어요. 투숙객은 맑은 공기 대신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셔야 하며, 적막 대신 도로의 소음과 엔진 소리를 들어야 하죠. 또한 옆에 서 있는 가격 전광판에는 끊임없이 변동하는 연료비가 표시되어 현대 경제의 불안정성을 직시하게 만드는 불편한 호텔인 셈입니다.
이미 어두컴컴한 지하 벙커를 지나, 눈부신 대자연과 시끄럽고 냄새나는 주유소 옆까지 확장된 ‘장소 없는 장소’, ‘부동산 없는 부동산’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이미 캠핑과 러닝, 등산과 낚시 같은 레저의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구 궤도를 돌며 즐기는 파인 다이닝이나, 전자기기 없이 몇 주를 보내는 디지털 디톡스 명상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죠. 동시에 AI가 촉발한 효율과 자동화의 시대 속에서, 단 하루, 단 한 순간에만 붙잡을 수 있는 오프라인 경험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릭린 형제가 호텔의 본질이라 여겨지던 자산과 장치의 층위를 모두 없애버렸을 때, 결국 남은 것은 두려움을 느낄 만큼 한복판에 놓인 감정과 경험뿐이었죠.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인상적인데요.
도대체 우리가 진짜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글
EVERY WEEK Edito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