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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도 가까운

멀리서도 가까운

다른 곳에서 일하고 가정을 꾸리고 그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더라도 문득 여전히 이어져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재외동포 투표 제도도 그렇습니다. 먼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가도 선거철이 되면 다시 고향과 연결되는 거죠. 투표소 앞에 줄을 서는 순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나라의 정치와 일상이 내 손끝의 선택으로 이어진다는 게 새삼 흥미롭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게 누군가의 예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합의된 권리라는 점이에요. 멀리서도 가까운, 그 묘한 감각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주에는 음료수를 통해 지역의 저항 정신을 발신하는 ‘가자 콜라(Gaza Cola)’ 소개합니다.

가자 콜라 ⓒHailey Heaton

가자 콜라(Gaza Cola)는 팔레스타인 출신 디아스포라 활동가 오사마 카슈(Osama Qashoo)가 2023년 말 영국 런던에서 출시한 콜라 브랜드입니다. 카슈는 2000년대부터 BDS(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운동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 , 투자 철회 , 경제 제재를 장려하는 비폭력적인 팔레스타인 주도 운동-에 앞장선 인물인데요. 2023년 10월 시작된 가자 전쟁 이후 ‘보이콧은 쉽지만,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이 없다’는 데에서 착안해 가자 콜라를 만들었는데요. 2024년 8월부터 런던의 팔레스타인 하우스(Palestine House)라는 팔레스타인 문화공간 산하 사업으로 영국 내 판매, 운영되고 있습니다. 생산은 폴란드의 음료 공장에서 OEM 형태로 생산되어 영국으로 수입해 유통합니다. 2024년 말까지 벌써 50만 개 이상의 캔이 판매될 정도로 영국 내에서 상업적, 문화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요. 이러한 성공의 뒤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지역에서 일어난 코카 콜라 불매운동이 있었습니다.

 

가자지구에서 콜라를 마시는 소년 ⓒQuartz

이야기는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집트가 주도하는 아랍연맹의 ‘이스라엘과 거래하는 기업’ 보이콧 리스트에 코카콜라가 포함되면서 시장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는데요. 이듬해인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직후, 이스라엘 내 독점 보틀러 CBC(Central Bottling Company, 코카콜라 이스라엘)가 프랜차이즈 영업을 시작하고, 1998년에 코카콜라 시스템 산하의 독립 보틀러인 NBC(National Beverage Company)가 팔레스타인에서 가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되었는데요. 2000년대에 들어서서 인권단체 조사에 의해 CBC가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물류 센터을 운영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제법상 불법인 산업 정착촌에서 사업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토지와 물의 접근을 제한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2023년 격화된 가자지구 분쟁과 그로 인한 인도주의적 위기는 가자 콜라를 탄생시킨 방아쇠가 되었는데요. 2023년 11월 가자전쟁 상황에서 카슈는 다국적 탄산음료 기업들이 이스라엘의 군사행위를 간접 지원하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이에 불매로 대응할 대안 제품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특히 코카콜라가 이스라엘이 점령한 동예루살렘 등지에 시설을 두고 영업한다는 논란이 일자, 카슈는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자금을 차단하기 위해 직접 새로운 콜라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카슈는 가자 콜라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탐욕은 끝이 없지만, 필요는 한정적입니다. 사람들이 익숙한 공식, 맛, 유사성을 갖춘 놀라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사람들이 보이콧에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보이콧은 최전선에 설 수는 없지만 변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도구입니다. “

이러한 취지로 가자 콜라는 2024년 8월 런던 현지에서 첫선을 보였으며, 판매를 통한 모든 이익금을 가자 북부에 있던 알카라마 병원(Al-Karama Hospital)의 재건 프로젝트에 투입하고 있는데요. ‘학살에 가담하는 자본에 맞서 삶을 옹호하는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제노사이드-프리 (Genocide-Free) 콜라로 불리고 있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가자 콜라는 나눠주는 창업자 카슈 ⓒGaza Cola

챗 콜라(Chat Cola), 팔레스타인 콜라(Palestine Cola)와 더불어 가자 콜라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저항 정신을 담아 기획된 콜라의 대체 제품 중에서,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Palestine Diaspora)가 주도하여 탄생시킨 로컬 브랜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가자 콜라의 창업자인 오사마 카슈(Osama Qashoo)가 있었는데요. 

팔레스타인 활동가이자 영화감독인 카슈는 1981년 팔레스타인 서안 나블루스(Nablus) 인근에서 태어나, 2000년대 초반 제2인티파다 기간-이스라엘의 점령지에 대항한 팔레스타인인의 대규모 봉기- 동안 팔레스타인 공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그는 빈 고물 VHS 카메라를 활용해 조작된 영상을 찍어 이스라엘 봉쇄 상황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2001년에는 비폭력 저항 운동 그룹  ISM(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을 공동 창립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03년, 그는 서안지구의 분리 장벽(apartheid wall) 반대 평화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인해 체포 위협을 받아 영국으로 망명했는데요. 영국에서 그는 국립 영화텔레비전학교(National Film and Television School, NFTS)를 다니며 필름 작업에 매진하면서, 2006년에 발표한 ‘A Palestinian Journey’알자지라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Al Jazeera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에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그는 가자 자유 선단 (Gaza Freedom Flotilla)에도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압수되고 그는 체포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후 터키로 추방되었지만, 가족의 단식 투쟁으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런던에서 생계 문제에 부딪치면서 2012년 가족의 레시피로 만든 팔레스타인 레스토랑 히바 익스프레스(Hiba Express)를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뿌리를 비즈니스로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는데요. 2024년에는 비로소 가자 콜라의 런칭과 함께 복합문화공간 팔레스타인 하우스(Palestine House)를 오픈하면서 디아스포라 활동가로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하우스 ⓒPalestine House
팔레스타인 하우스 ⓒPalestine House

특히 런던 중심부에 있던 학교 건물을 리모델한 팔레스타인 하우스는 팔레스타인의 생활과 예술을 전파하는 ‘문화 대사관(Cultural Embassy)’를 컨셉으로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문이 100% 소유하고 있는 건물의 내부는 타일의 무늬와 목재 구조 등팔레스타인의 전통 건축 양식을 모티브로 디자인 되었는데요. 추방된 팔레스타인의 상징인 거대한 나무 열쇠가 걸려 있는 중심 공간에서는 영화 상영, 강연, 낭독회, 전시, 콘서트 등 문화 프로그램이 열립니다. 런던의 팔레스타인 커뮤니티가 모이는 공유 오피스와 카슈가 창업한 팔레스타인 음식점 히바 익스프레스가 고향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 하우스는 가자 콜라의 생산과 유통 거점이기도 합니다.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시작된 가자 콜라는 초창기 히바 익스프레스와 인근의 팔레스타인 요리 전문점들을 통해 지역 한정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출시 후 입소문을 타면서 영국 내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와 무슬림 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창립자는 지인들이 운영하는 다른 팔레스타인 식당들에도 입점을 추진하여 런던 일대의 음식점에서 가자 콜라를 취급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나 정치적 배경으로 인해 대형 슈퍼마켓이나 주류 유통망과의 거래는 쉽지 않았습니다. 카슈에 따르면 여러 유통 파트너들이 제품명이나 디자인 때문에 협업을 꺼리거나 정치적 부담을 느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자 콜라는 풀뿌리 유통 전략으로 꾸준히 판매망을 넓혀갔습니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에 있는 무슬림 운영 상점 알 아크사(Al Aqsa)에서도 가자 콜라를 입고해 판매했는데, 한때 재고가 동날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2024년 8월부터 연말까지 영국 내에서만 50만 캔 이상이 판매되며 초기 목표를 훨씬 넘겼는데요.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온라인 채널을 통한 주문도 대폭 증가했습니다. 스페인,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쿠웨이트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연대 소비자들도 가자 콜라를 구매하기 시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나 서안지구의 소비자들은 이스라엘의 봉쇄와 물류 제한으로 인해 정작 가자 콜라를 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가자 콜라 ⓒGaza Cola

팔레스타인의 저항 정신에서 탄생한 브랜드인 만큼 시각적인 요소에서도 브랜드의 정체성이 직관적으로 드러납니다. 디자인 단계부터 정치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웠는데요. 창립자인 카슈는 제품 개발 과정에서 상표명과 디자인을 완화하자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지만 가자(Gaza)라는 이름과, 깃발, 색상도 붉은색 그대로 사용하기로 고집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데 타협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켰고, 결국 가자 콜라의 브랜드는 직설적인 메시지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빨간색 바탕의 캔은 유명 콜라 브랜드를 연상시키면서도 동시에 다른 인상을 주는데요. 캔 상단이나 하단 가장자리에는 팔레스타인 전통 머플러 ‘케피예(keffiyeh)’의 패턴 띠를 넣어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과감한 디자인 덕분에 가자 콜라는 단번에 시선을 끌며,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브랜드 정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케팅 전략 또한 제품의 태생적 이야기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먼저 2024년 하반기 런던에서의 소프트 런칭 당시, 카슈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런던 시내 가자지지 시위 현장을 돌며 무료 시음캔과 전단지를 배포하는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하우스 건물 외벽에는 거대한 가자 콜라 광고 배너를 내걸고, SNS 채널을 통해 ‘자유의 맛(Taste of Freedom)’이라는 슬로건을 발신하고 있는데요.가자 콜라를 구매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감과 의미를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자 콜라 ⓒGaza Cola

가자 콜라는 디아스포라 지역성의 힘을 드러낸 상징적 사례이자, 소비자가 윤리적 선택을 통해 국제 문제에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준 성공적인 모델입니다. 특히 지역이라는 물리적인 범위를 벗어나, 소비를 통해 연대를 실천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전통적으로 정치적 연대는 시위나 성명, 기부 형태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가자 콜라는 일상적인 소비 행위를 연대의 수단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시민들은 코카콜라 대신 가자 콜라를 집어드는 작은 선택만으로도 ‘팔레스타인 편에 서는’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고, 실제로 그 소비가 가자의 병원 건설로 이어지는 물적 지원이 된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끼게 되는 건데요.

이처럼 윤리적 소비가 주는 만족감은 가자 콜라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 코카콜라·펩시 등의 보이콧에 힘입어 현지 대체 브랜드들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요르단의 매트릭스 콜라(Matrix Cola)나 이집트의 스피로 스파티스(Spiro Spathis)처럼 일찍이 등장한 지역 콜라 브랜드들도 최근 불매운동을 계기로 판매량이 큰 폭으로 늘었습니다. 이처럼 지역적 자본으로 운영되는 대안 브랜드들이 각지에서 탄생하고 성장한다는 것은, 글로벌 소비시장의 흐름이 단순한 자본 논리를 넘어 정치-사회적 가치에 반응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Hailey Heaton

런던에서 시작되어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의 이슈를 다루는 가자 콜라는 런던의 로컬 브랜드일까요, 팔레스타인의 로컬 브랜드일까요.

멀리 바다에 띄워 보낸 작은 병은 누군가에게 닿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마음입니다. 가자 콜라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여기에 함께 있다’는 신호를 전하고, 동시에 스스로에게 다짐을 확인하는 매개가 됩니다. 한 캔의 음료에 담긴 메시지는 거대한 기업에 맞서는 저항일 수도 있고, 지역을 다시 세우려는 작은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멀리 런던에서 만들어진 콜라가 팔레스타인의 삶과 기억을 가깝게 불러오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 역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번쯤은 멀리서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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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라는 우산

동네라는 우산

우리가 ‘동네’라고 부를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집 앞 편의점까지, 매일 걷는 공원과 카페까지, 아니면 지하철 두세 정거장 떨어진 친구의 집까지도 포함될까요. 누군가에게는 모퉁이를 돌면 바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이 전부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오가며 쌓인 기억의 반경이 동네의 경계가 됩니다. 흥미로운 건, 이 경계가 늘 고정된 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관계, 기분, 이동 수단에 따라 그 범위는 유연하게 바뀌죠. 비 오는 날에는 발걸음이 짧아지고, 맑은 날엔 조금 먼 길도 즐겁게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죠. 

이번 주에는 동네의 개념을 바꾸는 우산 공유 서비스 ‘아이카사(アイカサ, iKasa)’ 소개합니다.

아이카사 ⓒiKASA

아이카사(iKasa)는 일본 최초의 우산 공유 서비스로, 비 오는 날 우산을 빌려 쓰고 원하는 장소에 반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플랫폼입니다. 2018년 12월 도쿄에서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우산이 없는 사회’를 목표로 일본 전역에 약 1,600여 곳의 대여 스팟과 약 6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플랫폼으로 성장했습니다. 

아이카사를 이용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스마트폰으로 아이카사 앱 또는 일본의 메신저 앱 라인(Line)에서 회원 등록과 결제한 후, 우산 스탠드에 부착된 QR 코드를 스캔하면 잠금이 해제되어 우산을 빌릴 수 있습니다. 우산 사용 후에는 최초에 우산을 대여한 장소로 돌아갈 필요 없이, 가까운 아이카사 스팟에 반납할 수 있어 아주 편리한데요. 이러한 서비스를 통해 아이카사는 ‘젖지 않는 생활’을 제안하며, 급작스러운 비에도 우산을 구매하거나 휴대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생활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이카사의 개념 ⓒiKASA

일본에서 매년 소비되는 약 1억 2천만 개의 우산 중에서 60%에 해당하는 약 8천만 개가 일회용 비닐 우산일 정도로 일본은 세계 최대의 우산 소비국 중 하나인데요. 아이카사는 버려지는 일회용 우산 문제에서 출발했습니다. 창업자인 마루카와 쇼지(丸川照司)는 말레이시아 유학 시절에 우버(Uber)나 그랩(Grab) 같은 차량 공유 서비스를 비롯한 현지의 다양한 공유경제 사업을 직접 경험하면서,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분야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특히 당시에 일본에서는 자전거 공유 등이 시작되던 시기였는데, 매년 수천만 개씩 버려지는 우산 문제를 보고 이를 비즈니스의 힘으로 해결하기로 결심, 2018년에 두 명의 친구와 함께 Nature Innovation Group 회사를 설립하고 아이카사를 런칭했습니다. 마루카와 쇼지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닐우산은 누구나 한 번쯤 사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 갑작스러운 수요 때문에 구매하게 되죠. 우산을 안 가지고 나왔는데 비가 내리고 있고, 이미 집에는 여러 개의 비닐우산이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또 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건 비닐우산 자체가 아니라 ‘비에 젖지 않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경찰청의 분실물 상위 목록에도 우산이 포함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건 찾으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아이카사 스팟 ⓒiKASA

아이카사의 사업 구조는 공유 플랫폼 모델을 따르고 있는데, 주로 이용자 요금과 파트너십 수익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본 요금은 24시간당 140엔으로 책정되어 있어 하루 내에 반납하면 동일 요금만 부과되고, 자주 이용하는 고객을 위해 월 280엔의 정액 이용권(구독형)을 제공하여 한 달간 횟수 제한 없이 우산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이카사의 수익 모델은 기본적으로 이용자가 지불하는 대여 요금이 중심이지만, 동시에 B2B 제휴를 통해서 부가적인 수익 창출 뿐만아니라 브랜드를 확장하는 방식이 흥미로운데요. 202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2030년 일회용 우산 제로 프로젝트’는 서비스가 제공되는 공간의 범위에 따라 ‘For Building(건물 단위)’, ‘For City(도쿄 도내 지역구, 도시 단위)’, ‘For Local(지방 자치 구역 단위)’ 로 구분하여 파트너십을 맺고 확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카사는 기획 단계부터 일본의 주요 철도사업자와 협업하여 우산 스팟을 철도역에 설치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요. JR동일본은 아이카사에 투자까지 진행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결과 도쿄 수도권의 주요 JR 역들을 중심으로 아이카사 거치대가 속속 들어섰습니다. 나아가 아이카사는 2024년까지 도쿄도와 인근 3개 현의 모든 역(약 1000개역)에 아이카사 우산 스팟을 설치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철도회사들과 협력 중인데요. 이 프로젝트에는 JR 그룹뿐 아니라 일본의 10대 철도사업자 모두가 참여하여 역사 공간을 공유 우산 인프라로 만드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도쿄 메트로 지하철역, 오사카 메트로 및 한큐·한신 철도역, JR서일본·JR큐슈 등의 역사 내에도 아이카사 대여소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통망과의 연계는 ‘비가 와도 이동에 불편함이 없는 도시’를 만드는 아이카사의 비전에 필수적인 요소로, 각 철도사는 탄소중립과 ESG 경영의 일환으로 이 움직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아이카사 x 날씨의 아이 협업 우산 ⓒiKASA

우산을 광고 매체로 활용하는 사업 모델도 인상적입니다. 전통적인 디스플레이나 옥외 광고와는 다른 방식의 광고 매체를 원하는 광고주들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 셈인데요. 기업의 로고나 메시지를 우산 표면에 인쇄하여 홍보하는 것 외에도, 유명 캐릭터나 아티스트와 협업한 한정 우산을 제작해 화제를 모으곤 했습니다. 인기 애니메이션 영화 ‘굴뚝마을의 푸펠’이나 ‘날씨의 아이’와 협업하여 해당 테마 디자인 우산을 아이카사로 빌려주는 이벤트를 열었고, 이는 젊은 층의 큰 호응을 얻어 서비스 인지도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사가현의 사례처럼 지방 캠페인과 연계한 디자인 우산, IT기업 HENNGE처럼 자사 로고를 활용한 공동 디자인 우산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참여 기업 입장에서도 새로운 브랜드 홍보 수단으로 아이카사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편의점 로손(Lawson)은 일찍이 아이카사와 제휴하여 다수 지점에 우산 스탠드를 설치했고, 경쟁 편의점인 세븐일레븐과 패밀리마트 등도 추후 이 서비스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쇼핑몰 운영사나 호텔 체인 등도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아이카사와 파트너십을 체결하여, 자사 건물 내에 우산 대여소를 제공하거나 고객에게 무료 우산 대여 혜택을 부여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아이카사 우산의 구조 ⓒiKASA, Ca el la

일반적인 투명 비닐우산은 구조상 쉽게 부러지고 한두 번 쓰고 버려질 때가 많지만 아이카사의 우산은 특수한 구조로 만든 견고한 살대를 사용해 내구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사에라(Ca et la)에서 개발한 구조는 우산 뼈대 일부가 손상되더라도 부품만 교체하여 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하나의 우산을 여러 해에 걸쳐 지속해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아이카사 우산 하나의 평균 수명은 약 5년, 그 동안 약 500회 대여가 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이는 우산 한 개로 수백 개의 일회용 우산을 대체한다는 의미이며, 아이카사 서비스 전체적으로도 막대한 자원 절약 효과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아이카사는 이러한 지속가능성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 도쿄 금융 어워드(Tokyo Financial Award)에서 ESG 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카사 ⓒiKASA

아이카사를 소개하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 아이카사는 「우산」에서 현대의 사회를 바꾸어, 미래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쾌적해지는 사회나 지구 환경을 만들어 갑니다. 
몇 년 후에는 ‘옛날 사람들은 우산을 사고 있었구나’라는 대화가 태어날 정도로 우산을 공유한다는 개념이 당연하다는 사회를 만들어 냅니다.” 

우산을 공유한다는 개념은 그 자체로 개인의 도시 공간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평소 비 예보가 있으면 집 근처에 머무르거나 이동을 꺼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산을 안 들고도 빈손으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언제 어디서 갑자기 비가 내려도 가까운 곳에서 우산을 빌릴 수 있고, 비가 그치면 가장 가까운 스팟에 반납하면 되니까요. 덕분에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 반경을 넓힐 수 있게 되고, 개인이 느끼는 ‘내 동네’의 범위도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산을 빌려 이동할 수 있는 거리’로 생활권의 단위를 재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카사 ⓒiKASA, Recycle Tsushin

현대의 도시계획에서는 거시적인 인프라뿐 아니라 일상의 디테일을 촘촘히 설계하는 움직임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산 공유 서비스처럼 개인과 도시의 정서적 관계에도 영향을 주는 공공적 성격의 요소들을 마이크로 인프라(Micro Infrastructure)라고 하는데요 .도시의 ‘살기 좋음(livability)‘은 거창한 건축물이나 개발사업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세밀한 부분—깨끗한 공중화장실, 편리한 벤치, 적절한 그늘막, 그리고 우산 같은 작은 편의까지—에서 나온다는 이론입니다. 어쩌면 그저 우산 하나 빌려주는 작은 서비스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도시민의 이동 습관을 바꾸고 생활권 범위를 재정의하며, 지역에 대한 애착과 공동체 의식까지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아이카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동네의 세심한 배려를 느끼고, 그만큼 동네를 신뢰하며 사랑하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어쩌면 ‘도시 설계’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비 오는 날 작은 우산 하나로 누군가 미소 지을 수 있게 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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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가 모일 때

작은 불씨가 모일 때

공유라는 단어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한때 비즈니스에서 유행처럼 번지면서 소비냐 공유냐를 가르는 이분법 속에서 소모되곤 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과도기를 지나 공유라는 것이 합리적이고 지속가능한 생활을 위한 삶의 방식의 하나로 인식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넷플릭스 계정을 나누어 쓰는 것처럼, 머지않아 우리는 이웃들과 가정용 인공지능 로봇을 함께 쓰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거창한 기부나 봉사활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물건과 공간, 시간을 주고받으면서 ‘나누는 감각’을 다듬어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눔의 대상을 가족과 친구들을 넘어서 함께 살아가야 할 환경- 자연과 도시로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동네도 조금은 다른 풍경으로 바뀌게 되지 않을까요?

이번 주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공유의 가치를 제안하는 벨기에의 복합공간 ‘델파브리크(Deelfabriek)’를 소개합니다.

델파브리크 ⓒFarah Fervel

벨기에 플란데런 지역 코트레이크(Kortrijk)시에 위치한 델파브리크(Deelfabriek)는 1940년에 건설된 옛 소방서 건물을 리노베이션해서 탄생한 커뮤니티 센터입니다. 2023년에 문을 연 델파브리크는 네덜란드어로 ‘공유 공장’이라는 뜻인데요. 이름에 걸맞게 시민들이 물품을 교환, 대여, 수리, 재분배하며 서로 교류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는 복합 공간입니다.

무언가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선 모여야하겠죠! 그래서 델파브리크의 핵심 기획 의도는 ‘한 곳에 모두 모은다’로 요약됩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거나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공유·나눔 사업에 관련된 시민 이니셔티브들을 한 공간에 모아 시너지 효과를 내고, 공간이 부족해서 참여하지 못했던 프로젝트까지 수용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공유 플랫폼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로써 시민들은 한 장소에서 다각적인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고, 참여 단체들은 서로 협력하며 서로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게 됩니다. 말 그대로 연대·자립·지속가능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공장’인 셈인데요. 이에 대해 부시장인 필립 드 코엔(Philippe De Coene)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델파브리크는 그 어느 때보다 가난한 사람부터 부유한 사람까지 다양한 관심사와 전문 분야를 가진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델파브리크는 지역 사회와 도시의 모습을 반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배우고, 교류하고, 공유하는 공간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든, 재활용을 믿기 때문이든 말입니다.”

소방서로 운영되던 옛 건물의 모습 ⓒNoël Samaille, Beeldbank Kortrijk

델파브리크의 출발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코트레이크 시는 도시 차원에서 빈곤 문제 해결과 지속가능성을 함께 추구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시민 공유경제 프로젝트를 시범 운영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바로 델파브리크의 전신으로, 취약계층 가정을 지원하기 위해서 몇몇 자발적 시민 모임들이 모여 옷과 물품을 교환하거나 수리해주는 활동으로 시작되었는데요. ‘필요한 물품은 빌리고 나누며, 그냥 버려지는 자원을 활용하여 모두에게 이득이 되게 하자’라는, 공유와 나눔을 소유의 대안으로 삼는 철학 아래에서 운영되었습니다. 

운영 초기부터 이 공유센터는 큰 호응을 얻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2년차인 2019년에 이미 등록 회원 1,500명, 누적 방문자 5,500명 이상을 기록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공간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요. 참여를 원하는 시민 단체와 이웃들이 늘어나고, 제공되는 서비스가 다양해지면서 보다 큰 공간과 체계적인 지원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도심에 오래도록 방치되어 온 옛 소방서 건물을 재활용할 기회가 생기면서, 이 역사적 건물을 공유경제의 거점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델파브리크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입니다.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델파브리크의 중정 ⓒFarah Fervel
마을의 새로운 등대 'THERE'S SOMETHING IN THE AIR' ⓒKortrijk

델파브리크는 2003년에 보호 문화재로 지정된 수직 소방 호스 건조탑을 포함하는 원래 건물의 특징적인 요소를 보존함과 동시에, 내부 공간을 현대적인 사용에 맞게 개조했습니다. 내부에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들이 갖추어져 있는데요. 주민 모임과 이벤트가 열리는 소셜 레스토랑 미니-보르크(Mini-VORK), 옛 소방차 차고 공간들을 활용한 공유 프로그램 공간들, 건물의 높은 탑에 설치한 암벽 등반 시설 클림 옵 마트(Klim op Maat), 탑 꼭대기에 설치된 오스트리아 예술가 산드라 E. 블라터러(Sandra E. Blatterer)의 조명 예술작품 ‘THERE’S SOMETHING IN THE AIR’ 까지. 이 밖에도 소규모 회의실과 상담실 등이 마련되어 있어, 주민 모임이나 사회복지 상담 등의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능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공간을 유기적으로 풀어낸 디자인의 완성도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특히 어디부터 새로 만든 부분인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기존의 건물과 새로운 공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세심함이 돋보이는데요. 이에 대해 델파브리크를 설계한 건축사사무소 ATAMA(Atelier for Transformative Architecture & Masterplanning)의 공동대표 브람 아르츠(Bram Aerts)NAV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건물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것이 매우 보람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다면 보존하려고 노력합니다. 건물에 특정한 특징을 부여하려는 야망은 전혀 없습니다. 기존 건물과 싸우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훈련된 눈만이 옛것이 끝나고 새것이 시작되는 곳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델파브리크에서 운영하는 공유 프로그램들 ⓒKortrijk

독특한 공간 구성만큼이나 델파브리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18개의 공유 프로그램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교환-대여-수리-재분배-교류로 이어지는 공유의 순환 체계를 기반으로, 실제로 생활에 필요한 세부 항목들로 나누어서 구성되어 있는데요. 지역에 화재가 났을 때에 지체없이 달려가는 소방차의 차고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지역의 유휴 자원이 모이는 공유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1. 교환 분야
사용하지 않는 물품을 가져오면 필요한 다른 물품으로 바꿀 수 있는 교환 상점들이 운영됩니다.

  • Swop & Go
    0세에서 14세 사이의 아동 의류와 일반 의류를 교환. 학교용품, 침구 및 목욕용품, 파티옷 등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연례 캠페인을 여러 차례 개최
  • Sportrijk
    스포츠 의류 및 용품을 교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스포츠웨어, 스니커즈, 또는 작은 물품(암밴드, 헬멧, 스포츠 선글라스 등), 러닝 유니폼, 축구 유니폼, 유도복, 수영복 등
  • Boekdelen
    책을 서로 바꾸어 볼 수 있고, 교환할 책이 없어도 나중에 반납하거나, 소장용으로 보관. 요리책, 소설,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의 책, 스크랩북부터 청소년 도서까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특별 도서 등
  • Poezewoef
    장난감, 사료와 물그릇, 바구니 등 반려동물 용품을 교환. 반려동물 사료 구매에 재정적 어려움이 있는 주민들이 지역 사회복지사를 통해 사료를 지원받을 수 있는 동물사료은행 운영.

2. 공유(대여) 분야
라이브러리형 대여 서비스를 통해 각 가정이 가끔씩만 사용하는 물품들을 함께 소유하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 Instrumentheek
    가정용 공구와 원예 도구 등을 빌려주는 공구 도서관. 집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드릴, 연삭 휠, 잔디 깎는 기계를 기부하면 일주일 대여권 제공.
  • Tvelootje
    아이의 성장에 따라 적합한 자전거를 빌려주는 아동 자전거 대여 시스템. 현장에서 자녀의 키를 측정해서 적정한 자전거를 대여. 
  • Babytheek
    모유수유 베개, 아기 침대, 암밴드, 유모차 등 단기간 유아용품 대여 서비스. 
  • Spelotheek
    아이들의 장난감과 보드게임 약 1,700여 점을 대여하는 장난감 도서관. 

3. 수리 분야
고장난 물건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 Fietskeuken
    자전거를 직접 고치거나 점검할 수 있도록 공간과 도구를 제공하는 바이크 키친. 
  • Repair Café
    주민들이 소형 가전제품이나 가구 등을 가져와 자원봉사 수리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수리하는 정기 모임. 참여자들이 함께 수리에 도전하고 기술을 배우는 커뮤니티 행사도 진행. 전자 제품, IT 장비, 소형 가전제품 등
  • Naaihoek
    간단한 의류 수선이나 리폼, 지역 재봉 자원봉사자들의 재능 기부로 운영되는 재봉 코너. 

4. 재분배 분야
사회적 취약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물자 재분배 서비스를 운영합니다.

  • De Vaart
    저소득 가정에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소득 연동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사회적 슈퍼마켓. 이는 일반 상점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질 좋은 식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으로, 지역 식품은행과 협력해서 제공. 신선식품, 건조식품(유제품, 과일, 채소, 육류, 빵 등) 및 냉동식품(즉석식품, 채소 등) 등 
  • Pamperbank
    남는 기저귀를 기부받아 어려운 가정의 아기들에게 무료로 또는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기저귀 은행.

5. 교류 및 공동체 활성화 분야
물품 나눔 이외에도 주민들 간 소통과 역량 강화를 위해 센터 내 만남 공간에서는 정기적으로 워크숍, 교육, 이벤트가 열리고 있습니다.

  • Digipunt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노인층 등 디지털 취약 계층의 주민을 돕는 IT 지원 공간. 자원봉사자들이 간단한 컴퓨터 활용법을 가르치고, 온라인 행정 처리를 도와주는 등 디지털 포용 서비스를 제공. 문서 스캔과 인쇄,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를 무료로 이용. 
  • Kinderpraat
    영유아와 부모들이 함께 모여 놀이, 동화 읽기, 양육 정보 교환 등을 하며 육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어린이/부모 모임 프로그램.
사회복지 분야에 종사하는 어머니와 딸이 함께 하는 아동복 교환 매장 ⓒSwop & Go
높은 장비 가격과 교육 과정 때문에 클라이밍을 포기한 사람들을 위한 델파브리크의 실내 암벽 등반장 ⓒKortrijk

델파브리크는 누가 어떻게 운영하고 있을까요? 

델파브리크는 초기 구축 단계에서는 공공 재정투자로 마련되고, 운영 단계에서는 시 예산과 소규모 자체 수입, 민간 기부 등으로 꾸려지는 구조입니다. 리노베이션 및 인프라 구축을 포함한 초기 투자비용은 코트레이크(Kortrijk) 시를 포함한 공공 부문의 다양한 재원에서 충당되었습니다. 총 투자비는 약 625만 유로로, 이 중 60% 가량(약 385만 유로)을 코트레이크 시 자체 예산에서 투입하였고 나머지 40% 정도(약 240만 유로)는 상위 정부 및 EU에서 지원받았습니다. 여러 공공 부문의 협조로 분산 투자가 이루어졌기에 시 재정 부담도 완화되었고, EU 기금을 활용하여 국제적인 모범사례로서 위상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 펀딩 방식은 델파브리크의 공공성을 담보하면서도 재정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데요. 현재 EU와 정부의 추가 지원 없이도 시와 지역사회 힘만으로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 운영궤도에 올라섰습니다. 

재정적인 부분과 마찬가지로, 운영에 있어서도 코트레이크 시 당국이 주도하고 여러 파트너가 협력하는 형태로 운영됩니다. 프로젝트 소유 및 총괄은 코트레이크 시청(Stad Kortrijk) 산하에 있으며, 시는 건물 관리와 행정 지원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특히 코트레이크 공공사회복지센터(Openbaar Centrum voor Maatschappelijk Welzijn, OCMW / Public Centre for Social Welfare, PCSW)는 델파브리크 운영에 긴밀히 참여하는 주요 공공기관 파트너인데요. OCMW는 취약계층 발굴과 지원이라는 공통 목표를 갖고 시와 공동으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며, 예산 확보와 프로그램 설계 단계에서부터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델파브리크 내의 일자리체험 프로그램과 가족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델파브리크의 운영 조직에는 시를 중심으로 공식·비공식으로 연결된 여러 사회적 경제 조직과 비영리 단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델파브리크 내의 식당 미니 보르크(Mini-VORK)는 코트레이크 시의 로컬 음식점인 보르크(VORK)에서 운영하는데요. 보르크는 원래 요리훈련과 저렴한 식사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델파브리크에 작은 분점을 열어 방문객들에게 건강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지역 환경 NGO는 정기적으로 식물 모종 교환행사를 열고, 지역 도서관은 책 교환 코너와 오디오북 녹음실 운영을 돕고 있습니다. 

이렇듯 운영 주체들이 각자 전문성에 따라 역할 분담을 하고 시가 이를 아우르면서 필요한 자원을 배분하는 구조를 통해, 공공과 시민사회가 동반자 관계를 맺어 서비스를 공동 생산하는 사례로, 지역사회 중심의 지속가능한 운영 방식을 보여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델파브리크 ⓒKortrijk

델파브리크에서의 나눔은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방적인 구조가 아니라, 서로 빌리고 돌려주며 함께 책임지는 공동의 울타리인 셈인데요.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은, 언젠가 자신이 쓰지 않는 것을 다시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순환하는 흐름 속에서 개인의 경제적 부담은 줄고, 물건의 수명은 길어지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는 동네라는 물리적인 연결 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느슨하지만 의미 있는 마음의 끈으로 연결됩니다.

지구 반대편의 이 작은 공간은 우리에게 소유의 안전함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공유의 불확실성 속에서 더 풍요로운 삶을 모색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우리가 사는 집에서 무엇을 조금 더 나눌 수 있을지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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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고쳐가는 일

함께 고쳐가는 일

우리는 여전히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고, 사고, 버리고, 다시 소비합니다. 소비사회의 안티테제로 무인양품이 등장한 지도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 철학은 여전히 일상의 관성에 가로막혀 있는 듯 보입니다. 디자이너 바바 고시는 니시무라 요시야키의 책 『자기만의 일』에서 “지금 사회는 모두가 남의 것으로 남의 일을 하고 있고, 그 결과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반경 안에서 필요한 것을 손에 넣고, 그 안에서 순환하는 삶을 문화라고 정의했습니다.

거대한 자본주의 생태계를 벗어나긴 어렵지만, 각자가 생활인으로서 주변을 돌보고, 고치고, 유지하는 일에 참여하는 아주 오래된 태도가 다시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지속가능한 유지관리 사회 시스템을 제안하는 프로젝트 ‘유지보수를 위한 개방(Open for Maintenance – Wegen Umbau geöffnet)’ 을 소개합니다.

Open for Maintenance ⓒArch+, Summacumfemmer, Büro Juliane Greb

‘Open for Maintenance(이하 OFM)’는 2023년 제18회 베니스 국제건축비엔날레에서 독일관이 선보인 특별 프로젝트로,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행동 프레임워크를 표방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말 그대로 독일관 전체를 2022년 미술 비엔날에서 사용된 40여 개 국가관과 전시가 끝나고 나온 폐자재와 작품의 잔해, 재료들을 모아두는 거대한 창고로 만들었는데요. 이것들을 활용해서 비엔날레 뿐만 아니라 베니스 지역에 필요로 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ARCH+ 편집팀과 건축 그룹 Summacumfemmer와 Büro Juliane Greb이 공동 기획하였으며, 안-린 응오(Anh-Linh Ngo), 안네 페머(Anne Femmer), 줄리아네 그레브(Juliane Greb) 등 건축가·이론가들이 큐레이터로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OFM을 통해 건축 및 전시 분야에서 만연한 자원과 인간 착취 기반의 관행을 넘어, 유지관리(Care & Maintenance)를 새로운 문화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독일관의 입구 ⓒArch+, Summacumfemmer, Büro Juliane Greb

비엔날레나 엑스포 같은 국제 전시는 원래 국가의 위상과 기술력을 세계에 알리고, 인류의 진보를 공유하자는 이상에서 출발했습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최초의 ‘만국박람회 (Great Exhibition)’를 시작으로, 산업혁명기의 과학기술과 문명 성취를 보여주는 무대로 자리잡았죠. 하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정보가 전지구적으로 실시간 공유되는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전시 형식은 자원의 낭비, 낮은 지리적 접근성, 일회성 중심의 주제 설정 등 여러 비판의 시험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식민주의 시기의 문화 우월주의적 전시 문법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도 여전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독일관은 OFM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관 전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인스탄트베자리움(Instandbesetzung)’이라 불리는 1980년대 베를린 점거운동의 개념을 재해석하여, 독일관을 있는 그대로 차지한 채 손보고 개선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요. 전시관을 새로 디자인하고 번쩍이는 신작으로 채우기보다는, 기존 공간을 점거하고 유지보수하는 과정 자체를 전시하는 것입니다. ‘과시적인 대표성(representation)’보다 ‘실질적 실천(practice)’을 강조한 이 방식은 비엔날레가 흔히 갖는 일회성 마케팅의 장을 넘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의미한 실험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요.

마리아 아이히혼의 작품을 배경으로 하는 워크샵 공간 ⓒArch+, Summacumfemmer, Büro Juliane Greb
독일관 입구에 새로 설치된 경사로 ⓒArch+, Summacumfemmer, Büro Juliane Greb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시는 독일관 건축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as found)’ 점거하고 유지보수하는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2022년에 독일관에서 전시했던 마리아 아이히혼(Maria Eichhorn)의 작품 「구조 이전(Relocating a Structure)」에서 건물 일부를 드러낸 상태 그대로 철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요. 이를 통해 베니스 미술 비엔날레와 건축 비엔날레를 공간적, 개념적으로 최초로 연결함으로써 서로 다른 시점에 열린 전시 사이의 연속성을 만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라는 대원칙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최소한의 보수 공사는 2022년 미술 비엔날레에서 남은 자재를 사용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변경된 부분들은 철저히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 계획되었는데요. 예컨대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독일관 건물의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구에 경사로를 설치했습니다. 경사로에 더해 재활용 카페트로 만든 간이 의자를 설치하여, 독일관 입구를 관람객이나 주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일종의 작은 광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요. 이러한 입구 공간의 변화는 독일관을 권위적인 국가 상징물에서 일상적 활동의 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입구 뿐만 아니라 독일관 내부의 화장실을 모든 성별이 사용 가능한 성중립 화장실(Gender Neutral Toilet)로 개조하고, 주방과 모임 공간을 마련한 것 역시 독일관을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방문객들이 어우러지는 생활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런 전략은 2023년 건축 비엔날레의 주제였던 ‘미래의 실험실(The Laboratory of the Future)’에 비추어 생각해볼 때, 독일관을 국가 대표 건축을 뽐내는 전시실이 아니라 공동 작업과 학습의 실험실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전시에서 거주로(From Exhibition to Habitation)’ 나아가야 한다는 현지 활동가 마르코 바라발레(Marco Baravalle)의 슬로건을 실현한 것입니다. 

Open for Maintenance ⓒArch+, Summacumfemmer, Büro Juliane Greb
Maintenance 1:1 프로그램의 5주차 워크샵 ⓒSUMMACUMFEMMER
Maintenance 1:1 프로그램의 18주차 워크샵 ⓒSUMMACUMFEMMER
Maintenance 1:1 프로그램의 23주차 워크샵 ⓒSUMMACUMFEMMER

독일관 내부 전시 구성의 핵심적인 컨셉은 ‘재료 저장소(The Material Repository)’ 입니다. 전시장 중앙에는 2022년 비엔날레에서 사용한 각국의 전시 폐자재—대리석 타일, 목재 상자, 환기구, 파이프 등—가 종류별로 쌓여 있는데요. 이 자재들은 비엔날레 전시 폐자재의 재사용을 돕는 현지 단체인 Rebiennale/R3B의 협력으로 수집된 것입니다. 관람객들은 이 낡은 자재 더미를 직접 둘러보며 새로운 용도를 상상해볼 수 있고, 디지털 카탈로그를 통해 해당 자재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은 비엔날레 기간 내에 진행된 워크숍 참여자들에게 자원으로 제공되어, 필요한 곳에 재활용되도록 설계되었는데요. ‘Maintenance 1:1’이라 명명된 현장 워크숍 프로그램이 비엔날레 기간 내내 운영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전 세계 32개 대학에서 온 건축·디자인 학생들, 독일 11개 직업학교에서 온 기술 견습생, 베네치아 현지의 17개 시민단체 등이 주축이 되어 총 29회의 주간 워크숍과 써머스쿨을 진행했습니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독일관에서 수집한 자재를 활용해 베네치아 도시 곳곳의 사회 인프라(커뮤니티 공간, 공공주택 단지 등)를 수리하고 개선하는 프로젝트들을 수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현지 시민단체의 실질적 활동을 지원하면서 전시와 도시 생활을 연결시키는 실험을 펼쳤습니다. 

Open for Maintenance ⓒArch+, Summacumfemmer, Büro Juliane Greb

무엇보다도 독일관이라는 물리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이러한 워크샵이 의미하는 사회정치적 맥락의 핵심은 베네치아 지역의 도시 문제입니다. 베네치아는 관광과 각종 국제 이벤트로 인해 지역 주민의 주거권과 일상 생활 기반이 잠식되고 있는 도시입니다. 실제로 화려한 관광지의 이면에는 수백 채에 달하는 공공임대주택이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고, 젊은 층이나 노동자들이 도심에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도 진행 중입니다.

OFM은 이러한 맥락에서 관광 산업으로 인한 도시 공간의 상품화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대신 공공선(common welfare)을 위한 유지관리 네트워크 복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역의 활동가들과 협력하여 실제로 빈민가의 시설을 수리하거나 공동체 공간을 개선하는 워크숍들은 단순히 일회성 체험 활동을 넘어,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주민 주도의 도시 재생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베니스 지역의 주거권, 사회통합 같은 이슈가 건축 비엔날레라는 국제적인 무대의 수면으로 올라올 수 있는 일종의 지역 유산(Legacy)을 남겼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Maintenance Art ⓒMierle Laderman Ukeles, Ronald Feldman Gallery

이 프로젝트에서 인상적인 것은 돌봄과 포용이라는 사회적 감각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전시 제목에 쓰인 ‘유지보수(Maintenance)’라는 단어 자체가 암시하듯, 그동안 많은 분야에서 주변에 머물렀던 청소, 수리, 관리의 노동의 가치가 전면으로 드러나기 때문인데요. 페미니스트 예술가 미얼 래더맨 우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Maintenance Art’를 통해 돌봄의 가치를 예술로 환기했던 것처럼, 독일관은 눈에 띄지 않던 존재들—건축 관리인, 기술자, 청소원, 활동가들에게 관심의 방향을 전환함과 동시에 전시의 주체로 끌어냈습니다. 그들은 이번 전시에서 단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매일 실천하고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는 동시대의 살아있는 인프라(Living Infrastructure)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 주변에서 고치고, 닦고, 돌볼 수 있는 무언가에 천천히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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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좋아서 좋다

덜 좋아서 좋다

‘좋다’는 건 누가 정하는 걸까요?

누군가는 빠르게 성공하는 걸 좋다고 하고, 누군가는 정제된 아이디어, 매끈하게 완성된 결과물을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늘 좋은데 아직 부족해 보인다던다, 좋은데 어딘가 어설프다던가 하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데에만 익숙해지는 게 아닐까요? ‘좋음’이라는 기준 아래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요하네스버그의 실험적인 예술 공간 ‘덜 좋은 아이디어를 위한 센터 (The Centre for the Less Good Idea)’ 를 소개합니다.

 

덜 좋은 아이디어를 위한 센터 ⓒWilliam Kentridge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덜 좋은 아이디어를 위한 센터(The Centre for the Less Good Idea, 이하 CFLGI)’는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브론윈 레이스(Bronwyn Lace)가 2016년에 설립한 실험적 예술 기관이자 인큐베이터입니다.

이 독특한 이름은 ‘좋은 의사가 고치지 못하면 덜 좋은 의사를 찾아가라(If the good doctor can’t cure you, find the less good doctor.)’는 뜻의 아프리카 츠와나족 속담에서 유래했는데요. 프로젝트의 초기에 좋은 아이디어가 현실에 부딪혀 균열이 생길 때, 그 틈새에서 나온 덜 좋은 아이디어를 따라가 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윌리엄 켄트리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부분 좋은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엔 모든 게 아주 명확해 보이죠.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실제로 꺼내어 펼쳐보면, 그 표면에 금이 가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균열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2차적인 아이디어—처음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생겨난 덜 완벽해 보이는 생각들—를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디어와 함께 놀다 보면, 미처 몰랐지만 어딘가 내면 깊은 곳에서 알고 있던 무언가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켄트리지 ⓒStella Olivier

이러한 철학에 따라 기존 무대나 갤러리에선 환영받기 어려운 짧은 형식의 실험적인 작품을 마음껏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도록 ‘멍청해질 수 있는 안전지대’를 예술가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설립된 이듬해 2017년 3월에 첫 번째 시즌 공연을 시작으로 실험, 협업, 즉흥성을 핵심 가치로 하는 4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 Seasons (연 2회 정규 공연 프로그램)
  2. For Once (비상시 일회성 공연 프로그램)
  3. SO Academy (교육 프로그램)
  4. The Centre Outside the Centre (국제 교류 프로그램)
'The Great YES, The Great NO’의 한 장면 ⓒStella Olivier
The Highway Notice Project ⓒZivanai Matangi

Seasons는 1년에 두 번 열리는 CFLGI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각 시즌마다 여러 편의 짧은 공연과 프로젝트를 묶어 선보입니다. 연극, 무용, 음악, 퍼포먼스 아트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수의 작품들이 한 시즌에 동시에 진행되는데요. 연말에는 며칠에 걸쳐 관객을 대상으로 연속 공연이 열립니다. 각 시즌에는 해당 시즌의 큐레이터와 참여 예술가들의 창의적 실험이 응축되어 있으며, 종종 시즌별로 주어지는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공연을 만들기도 합니다. 

For Once는 정규 시즌과 별도로 매달 또는 수시로 개최되는 1회성 공연 시리즈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새로운 작품을 단 하룻밤 동안 무대에 올리기 위해 외부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초청하여 선보이는데요. 센터와 지속적으로 협업해온 예술가들의 신작 발표회가 열리기도 하고, 해외의 예술가나 단체가 기존에 만든 작품을 가져와 센터의 공간 안에서 실험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For Once 무대에 오른 작품들은 데뷔 음악 공연, 장편 연극, 숏폼 신체극,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퍼포먼스 등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센터에서 일회 공연을 마친 후 더 발전되어 외부 무대로 진출한 사례도 많은데요. 최근에는 <The Highway Notice Project>, <The Long Minute>, <A Kafka Moment>와 같은 독특한 일회성 실험 프로젝트들이 For Onc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SO Academy는 2020년에 출범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무용가이자 교육자인 아테나 마자라키스가 디렉터를 맡아 이끌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을 위한 멘토십, 워크숍, 수업 등을 통해 창작 역량을 심화시키는 것이 목적인데요. 아카데미에서는 참가 예술가들이 개별 작품을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돕는 실습 중심의 클래스와 멘토 연계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Thinking in>, <In Conversation> 시리즈를 통해 예술적 사고를 공유하고, <How-Showing the Making>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창작 과정을 공개 시연하여 관객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센터는 단순히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교육과 담론 형성까지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The Centre Outside the Centre는 브론윈 레이스의 주도로 진행하는 국제 예술 교류 프로그램입니다. 자국 예술가들의 기회를 넓히기 위해 추진하는 대외 활동인데요. 요하네스버그라는 지역적 기반이 가지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적극 활용하여 해외의 예술 기관, 축제, 학교 등과 협력함으로써 남아프리카 예술의 입지를 넓히는 것이 목표입니다. 2024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Fondation Cartier)과 협업하여 약 20여 명의 남아공 및 국제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집중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열었습니다. 페퍼스 고스트(Pepper’s Ghost) 홀로그램 극법을 활용한 퍼포먼스, <Sizendlebe | We are Ears>라는 실험적 음악극 등 다양한 쇼케이스를 파리의 관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또한 2025년 2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주일간의 레지던시를 열어, UCLA 공연센터, 더 브로드 미술관 등과 함께 현지 관객들에게 센터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활동을 통해 CFLGI가 개발한 작품들을 해외 무대에 올리고, 다른 환경에서 센터의 예술적 방법론을 시험함으로써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새로운 실험을 위한 피드백을 얻는 중요한 채널을 얻게 되었습니다. 

Houseboy ⓒThe Centre for the Less Good Idea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CFLGI의 활동에는 탈식민주의적 감수성과 문화적 재현의 이슈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름의 유래가 된 속담은 남아공의 저명한 흑인 지식인 솔로몬 플라치예(Solomon T. Plaatje)가 전한 츠와나어 격언에서 따온 것인데요. 서구 중심의 ‘최선의 해결책’ 담론 대신에 토착 문화의 지혜와 대안을 존중하는 이 이름 자체만으로도 지역 고유의 언어와 지식을 예술 담론의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상징적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센터에서 인큐베이팅된 작품들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정체성을 독창적으로 조명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예를 들어, 카메룬 작가 페르디낭 오요노(Ferdinand Oyono)의 1956년 소설을 각색한 공연 <Houseboy>는 식민지 시대 흑인의 삶을 그의 일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으로, 요하네스버그의 센터에서 앙상블 캐스트에 의해 개발되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2017년에는 세계적인 탈식민 이론가인 호미 케이 바바(Homi K. Bhabha)를 초청하여 윌리엄 켄트리지와 함께 ‘걷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무거운 삶의 짐’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비공식 담화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센터는 남아프리카 및 범아프리카 지역의 고유한 서사를 예술로 풀어내서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지역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로컬 예술 생태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The Great YES, The Great NO’의 무대 인사 장면 ⓒZivanai Matangi

CFLGI가 보여주는 창작 방식은 기존 제도권 예술 기관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전통적으로 미술관, 상업 화랑, 프로 극장 등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별하여 전시·공연하고, 작품의 시장성이나 평론가들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반면에 CFLGI는 애초에 완결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완성의 실험 과정 자체를 공유하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창작의 결과물을 판매하거나 대중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보다 모험적이고 파격적인 시도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운영 모델은 예술 생태계의 중심을 거대 기관에서 작은 창작 공동체들로 분산시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술 창작과 지원이 하나의 거대 조직이나 시장 논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독립적인 실험 공간들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연계되는 분산형 생태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술 생산과 향유의 방식에 있어 기존 제도권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동시대 예술의 창작 생태계 다변화와 지식 생산의 탈중앙화의 관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CFLGI ⓒStella Olivier

인공지능이 일상 깊숙이 파고들고, 생산성과 효율이 극단적으로 최적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평면적인 사고 구조 안으로 희석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은 속도로, 비슷한 방식으로, 정답을 빠르게 내놓는 능력이 중요해진 사회랄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과 관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기준과 세계관은 점점 더 소중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좋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요?

‘좋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완성도와 효율성, 시장성과 호응 같은 잣대에 기대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술은 늘 중심에서 멀어진 곳에서, 예측할 수 없는 실수와 시행착오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의 중심은 ‘나’에서 출발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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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단한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가장 단단한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단단한 것은 대개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고, 손에 쉽게 닿지 않지만, 모든 것을 조용히 지탱하는 것들. 오래된 나무의 뿌리, 계절의 경계, 한 사람의 말없는 마음처럼요. 우리는 때때로 너무 많은 것들을 보려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지나쳐버립니다. 애써 찾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고 굳이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것들, 하지만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귀 기울여야 할 가치 아닐까요?

이번 주에는 버려진 나무의 뿌리로 만든 가구를 선보이는 업루티드(Uprooted) 소개합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Max Creasy
버려지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 ⓒMax Creasy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호르헤 페나데스(Jorge Penadés)는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역의 올리브유 생산 방식에 대한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업루티드(Uprooted)’ 프로젝트를 탄생시켰습니다. 안달루시아는 세계 올리브유 생산량의 20~25%, 스페인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최대 산지인데요. 최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화된 초집약 농법을 도입해 생산 방식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년 된 토착 올리브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격자 형태로 조성된 단일 재배지로 대체되고, 굴곡지고 단단한 올리브 나무의 뿌리들은 기계 가공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대량 폐기되거나 킬로그램당 0.10유로에 장작으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페나데스는 이러한 현실을 목격하고, 업루티드 프로젝트를 통해 산업 표준에 맞지 않는 재료들이 지닌 내재적 가치를 재조명하여 지속가능성과 생태계 보존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내고자 했습니다.

 

버려지는 가죽을 활용한 스트럭처럴 스킨(Structural Skin) 프로젝트 ⓒJorge Penadés
다른 매장에서 사용하던 자재를 재활용한 말라가의 캠퍼 매장 ⓒJosé Hevia

페나데스는 스페인 말라가 출생의 디자이너입니다. 무엇보다 지역의 산업적인 생태계와 소재 자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안달루시아 지역의 가죽 산업에서 버려지는 가죽 소재를 활용한 스트럭처럴 스킨(Structural Skin) 프로젝트나, 다른 매장에서 사용하고 방치된 재료를 재활용한 캠퍼 매장의 디자인이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페나데스는 전 세계 캠퍼 매장의 인테리어를 디렉팅하는 일을 맡았을 때에 기존에 매장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과거에 캠퍼(Camper) 매장은 켄고 쿠마와 하이메 아욘과 같은 세계적인 스타가 디자인했으며, 신발로 가득찬 벽과 신발끈으로 만든 천장 등 화려한 인테리어를 선보이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매장을 오픈한 후 작동하지 않는 부분들을 고치는 데에 1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 페나데스는 기존의 방식 대신에, 운영과 기능을 우선시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페인 말라가에 있는 그의 첫 캠퍼 매장은 곳곳에 널린 금속 프로파일을 모서리 판과 너트, 볼트로 고정하여 제작했는데요. 결과적으로 페나데스의 팀은 캠퍼 공장에 있는 것만을 사용해 매장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를 직접 제작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작동하는 가게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존에 있던 것들을 활용하고 변형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을 뿐이죠. 제 목표는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업루티드의 스케치 과정 ⓒJorge Penadés
재료 인터뷰 ⓒJorge Penadés
목업 테스트 ⓒJorge Penadés

소재와 디자인에 대한 그의 철학은 업루티드 프로젝트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업루티드의 핵심 재료는 산업 폐기물로 간주되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인데요. 올리브나무 뿌리는 자라는 방향이 제각각이고 내부에 작은 돌이 박혀 있는데다가, 목질이 지나치게 단단하고 건조 과정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휘어지는 등 일반 목재와 달리 가공이 어려운 점이 특징입니다. 페나데스는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 맞서기 위해 전통적인 디자인 방식을 전면 재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미리 정해둔 형태를 재료에 강요하기보다는, 재료와 대화하듯 반응을 관찰하며 디자인을 전개했습니다. 그가 ‘재료 인터뷰(Material Interivew)’라고 부르는 이 과정은 새로운 재료로서의 뿌리가 가진 한계와 가능성을 면밀히 탐구하여, 재료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이 결과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짓는 디자인 방법론입니다. 업루티드 프로젝트에서 페나데스와 함께 협업한 런던 소재의 소재 전문가 시탈 솔란키(Seetal Solanki)는 이러한 디자인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디자이너가 재료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되찾아야 합니다. 최소한의 것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료 중심의 디자인이 필요하거든요”

실제로 페나데스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와 일종의 인터뷰를 진행하듯 99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불에 그을리기, 절단, 물에 담가보기 등의 다양한 자극에 대한 재료의 반응을 실험했는데요. 이를 통해 탄생한 업루티드 프로젝트는 재료의 결함이 오히려 디자인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업루티드 책장 ⓒJorge Penadés
업루티드 체어 ⓒJorge Penadés
업루티드 체어 ⓒJorge Penadés

업루티드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가구 컬렉션은 2025년 2월에 스페인 마드리드 에스파시오 가비오타(Espacio Gaviota)에서 특별 설치 작품으로 공개되었습니다. 뿌리의 불완전함과 디자이너의 정교한 장인 정신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 인상적인데요. 선반, 테이블 디자인 , 의자, 그리고 벽등은 페나데스가 전시를 위해 직접 제작했습니다. 투박한 형태의 울퉁불퉁한 판자는 이 유물들에 수공예품 특유의 미감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우리가 환경을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업루티드는 지역의 재료와 사회문화적 맥락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방법론을 제안함과 동시에, 페나데스의 개인적 고향 이야기이자, 안달루시아 지역 공동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가장 개인적이면서 지역적인 프로젝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올리브 숲과 농경지는 안달루시아 지역 문화의 근간으로, 페나데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몸담아온 개인적 풍경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고향 풍경이 산업화로 변모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로 인한 지역 사회의 상실감을 디자인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요. 역사적으로 올리브 나무는 그 자체로 지중해 문화와 생태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로, 그 오래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지역 정체성의 뿌리입니다. 이처럼 재료 자체가 특정 장소의 역사와 맥락을 고스란히 명시하는 매개가 되고, 재료에 기반한 디자인 방법론 또한 지역 커뮤니티에 정체성에 대한 담론을 불러일으키는 열쇠가 됩니다. 실제로 전시에 사용된 사진과 자료들은 하엔, 코르도바, 그라나다 등 지역별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관람객에게 안달루시아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스트럭처럴 스킨 프로젝트를 활용한 벨루티 매장 ⓒJorge Penadés
업루티드 프로젝트를 활용한 캠퍼 본사 ⓒJorge Penadés

지역의 재료를 이해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산업의 이면을 드러내는 일. 그 당위성은 역설적으로 페냐데스가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지요. 그는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안달루시아를 관찰해왔고, 올리브 농업의 구조적 변화뿐 아니라 가죽 세공으로 대표되는 지역 산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발신해왔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프로젝트는 다시 스페인을 대표하는 로컬 브랜드 ‘캠퍼’의 매장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그의 디자인은 지역을 바라보는 방식이자, 그 지역의 이야기를 더 먼 세계와 연결하려는 언어인 셈인데요. 만약 그런 작은 움직임이 지역 산업의 감수성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변화의 시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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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적인 각본에 대해서

가장 사적인 각본에 대해서

어떤 집에 살고 싶으세요?

생각보다 자주 접하는 질문입니다. 아파트 청약 게시판에서, 부동산 광고에서, 휴가를 보낼 숙소를 고르는 순간에도 이 질문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반복됩니다. ‘집처럼 편안한 호텔’, ‘호텔 같은 집’, ‘누구나 꿈꾸는 집’, ‘가장 핫한 분양권’… ‘집’은 거주공간이자 경험이고, 욕망이자 투자 상품이며, 때로는 누군가의 성취를 증명하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볼 수는 없을까요? 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일상이 작동하는 기반이자 이야기의 토양입니다. 도시와 지역의 가장 작은 단위이며, 개인적으로는 존재의 중심을 이루는 장소이기도 하죠. ‘어떤 집을 가질 것인가’보다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에는 집을 무대로 하는 퍼포먼스 전시 ‘홈 스테이지(Home Stage)’ 를 소개합니다.

2023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에스토니아 파빌리온 ‘홈 스테이지(Home Stage)’는 집을 생활의 공간인 동시에 교환 가치로 보는 이중적 관점을 탐구하는 퍼포먼스형 전시입니다. 베니스의 살리자다 스트레타(Salizada Streta) 96번지에 마련된 에스토니아 파빌리온은 실제 주거용 아파트를 전시장으로 활용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요. 큐레이터 팀은 평범한 집을 독창적인 설치미술 무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주거 공간이 단순한 주거를 넘어 투자 상품이 되는 현대 사회의 모순을 다루며, 집과 부동산 사이의 괴리, 꿈과 현실, 세입자와 소유주, 거주자와 방문자 간의 대비를 드러내고자 했는데요. 쉽게 말해 주거 공간의 상품화가 불러온 문제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에스토니아의 주택 위기(Housing Crisis)라는 지역적 이슈를 전지구적 사회 문제로 확대하여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전시는 관람자에게 ‘과연 우리의 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집을 짓는 행위는 사람을 위한 것인가, 자본을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만드는데요. 이러한 주제 의식은 2023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전체 주제인 ‘미래의 실험실(Laboratory of the Future)’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홈 스테이지의 스케치 ⓒArvi Anderson, b210
홈 스테이지의 스케치 ⓒArvi Anderson, b210
홈 스테이지의 건축 모형 ⓒb210
홈 스테이지의 건축 모형 ⓒb210

홈 스테이지 프로젝트는 에스토니아의 건축 스튜디오 b210 소속 건축가인 아에트 아더(Aet Ader), 아르비 앤더슨(Arvi Anderson), 마리 멜드레(Mari Möldre)가 큐레이터 겸 기획자로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에스토니아 건축계에서 일상적 공간의 사회적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들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아에트 아더는 베니스 비엔날레 개막 당시베니스의 심각한 주거 문제와 치솟는 임대료는 에스토니아 탈린을 포함한 세계 여러 도시들의 현실을 반영한다면서, 세계적 무대에서 에스토니아의 주거 이슈를 공유하려는 전시 의도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홈 스테이지 프로젝트는 건축가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는데요. 에스토니아의 공연 예술가들이 퍼포머로 참여하여 실제로 베니스의 임대 아파트에서 한 달씩 거주하고 공연을 펼쳤습니다. 특히 주요 퍼포머로 참여한 리사 사레매엘(Liisa Saaremäel), 키이스티 쿠우스푸(Keithy Kuuspu)는 퍼포먼스 연출자(Director)로서도 이름을 올려, 일상의 동작들을 예술적 장면으로 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에스토니아의 작가 얀 카우스(Jan Kaus)가 극작가로 참여하여 전시의 내러티브와 대사 등 스토리 요소를 맡았고, 무대미술가 카이리 맨들라(Kairi Mändla), 음향 디자이너 마르쿠스 로밤(Markus Robam) 등이 팀에 합류하여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형 전시를 완성했습니다.

이처럼 건축, 문학, 공연예술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한 이유는 실제로 사는 사람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큐레이터 팀은 ‘건축가는 건물이 완공된 후에 그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볼 기회가 없는데, 집은 결국 사람의 몸과 이야기로 채워지는 공간’이라며 실제 거주 행위를 전시에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다학제적 협업 덕분에 홈 스테이지는 건축적 실험이자 일종의 사회극(social performance)으로 기획되었으며, 이를 통해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독특한 형태의 전시를 구현했습니다.

 

홈 스테이지의 벽장 ⓒKertin Vasser

 

집 안 거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선반입니다. 이 선반에는 다양한 소품과 서류 상자들이 진열되어 있는데요. 상자에는 다음과 같이 집의 이상과 현실을 암시하는 단어들이 적혀 있습니다.

꿈(Dreams)
자가 주택(Own house)
청구서(Bills)
대출(Mortgage)
유지관리(Maintenance) 

그 외에도 기묘한 부엌 도구들과 에스토니아 주거 환경을 담은 사진 엽서, 화분 등이 뒤섞여 전시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오브제들은 집에 얽힌 이상향과 경제적 현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홈 스테이지의 욕실 ⓒKertin Vasser
홈 스테이지의 침실 거울 ⓒKertin Vasser
홈 스테이지의 침대 시트 ⓒKertin Vasser

침실 천장에 설치된 거울은 관객이 방에 들어선 자신과 공간을 색다르게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로, 사적인 공간이 마치 전시품처럼 관찰되는 대상으로 느껴지도록 연출한 것입니다. 침대에는 아홉 명의 퍼포머 이름이 새겨진 흰 침대 시트가 놓여 있는데, 이는 이 공간이 한 사람의 집이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이 거쳐 가는 무대임을 상징합니다.

화장실에는 이 전시의 백미로 꼽히는 ‘싱크대 분수’가 있습니다. 두 개의 세면대와 변기, 욕조로 구성된 욕실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장면은 관람객에게 신선한 충격과 유머를 선사합니다. 

이처럼 집 안 곳곳의 평범한 가구와 설비를 변주한 설치미술 요소들—예컨대 거실의 먼지더미와 진공청소기, 주방 식탁 위에 놓인 이색적인 생활 소품들—은 관객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를 자아내어 집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홈 스테이지의 공연 장면 ⓒKertin Vasser

무엇보다 홈 스테이지의 공간 디자인은 공연(퍼포먼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퍼포머들은 전시장인 아파트에서 실제 생활 행동들을 연기하며, 관람객은 방문자 혹은 구경꾼의 신분으로 그 장면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퍼포머는 일정 시간마다 청소기 돌리기, 침대 시트 정리, 다림질, 식사 준비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집안일을 수행하는데, 그 모습이 관객에게는 하나의 공연으로 비쳐집니다. 동시에 예기치 못한 극적인 상황, 이를테면 집들이 파티에서의 연설, 부동산과의 계약과 같은 장면이 대본에 따라서 때로는 즉흥적으로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매일 약 1시간 30분 간격으로 집의 각 공간에서 반복 상연되는데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관객들은 거실, 부엌, 침실, 욕실 등을 자유롭게 돌며 마치 한 편의 연극 무대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하게 됩니다.

홈 스테이지 ⓒKertin Vasser

홈 스테이지는 에스토니아의 지역적 사회 문제를 국제 무대에 효과적으로 펼쳐 보인 중요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에스토니아 큐레이터 팀은 자국의 주거 현실을 프로젝트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에스토니아는 과거 소련 시절 대규모 아파트 블록이 조성되어 대다수 국민의 주거지로 사용되었고, 1990년대 독립 이후 갑작스러운 사유화와 부동산 시장화가 진행된 특수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에스토니아는 소련 붕괴 후 민간 소유권이 재확립되고, 이전 체제에서 국가가 소유했던 주택이 개인에게 돌아가거나 외국 자본에 매각되는 등 동유럽 전반에서 공통으로 겪은 주거 구조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전환 속에서 공동주택에 대한 반감과 개인 주택 소유에 대한 열망이 90년대에 폭발했는데, 이는 소련 시기의 집단 주거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큐레이터인 마리 멜드레는 “오늘날 에스토니아의 주거 공간 역시 세계적 경향과 마찬가지로 투자와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에스토니아 도시의 부동산은 해외 연기금 등 투자자본이 대거 소유하게 되었고, 지방자치단체가 공공임대주택을 지을 토지를 확보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어서 주거 불안정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집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똑같이 생긴 상품화된 아파트로 전락하고 있으며, ‘에스토니아의 많은 새 아파트 내부는 어디에 있어도 다 똑같은 이케아식 인테리어를 하고 있어서, 세계 어느 도시에 가도 똑같은 쇼룸 같은 집에 살게 된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이러한 에스토니아의 주택 시장 문제와 주거 문화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바로 홈 스테이지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큐레이터들은 이처럼 에스토니아의 특수한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를 보편적 의제로 확장하기 위해 베니스를 무대로 선택했습니다. 베니스는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동시에, 비엔날레 기간에 임대료 폭등과 지역 주민 주거 위기가 벌어지는 아이러니한 도시입니다. 큐레이터 아에트 아더는 “베니스의 주거 문제는 전 세계 도시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보여준다. 탈린을 비롯한 에스토니아도 예외가 아니다”라며, 베니스의 현실과 에스토니아의 현실이 맞닿아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파빌리온이 차려진 카스텔로 지역의 임대 아파트는, 평소라면 현지인이 거주했을 공간이 비엔날레 기간에 전시공간(즉 상업적 용도)으로 전용된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는 곧 거주민이 사라진 도심의 모습을 반영하며, 에스토니아뿐 아니라 전 세계 관광도시가 겪는 딜레마를 드러냅니다. 홈 스테이지는 이 공간에 에스토니아 퍼포머들을 실제 거주자로 참여시킴으로써, ‘집은 결국 사람이 있어야 집’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베니스 한복판에서 에스토니아인들의 생활-퍼포먼스를 지켜보며, 특정 지역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주거 문제로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홈 스테이지 ⓒKertin Vasser

큐레이터인 아에트 아더는 홈 스테이지 프로젝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전시에서 직접적인 주택 문제 해법을 내놓지는 않는다. 주거 문제 해결책은 각 지역의 특수성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방식을 다른 곳에 복사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집에 살면서도 집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순간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구조와 몇 평형인지, 얼마에 사거나 언제쯤 팔 수 있을지, 혹은 누군가의 집과 나의 집을 비교하는 일은 익숙하지만, 정작 집이 나에게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는 종종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 집의 각본은 과연 누가 쓴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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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는 영화에서

현실이라는 영화에서

“영화는 삶을 찍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과 삶 사이의 무언가다”
–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며 현실을 꿈꾸고, 현실 속에서 영화를 떠올립니다. 스크린 속 세계는 때때로 우리가 겪는 하루보다 더 선명하고, 더 아름다워 보이지만, 영화는 결국 끝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현실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죠. 만약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극장, 혹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스튜디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됩니다.

이번 주에는 매일 새로운 시나리오의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 ‘대화 극장(Dialogue Theater)’을 소개합니다.

 

대화 극장 ⓒ2025 Osaka-Kansai Expo

‘대화 극장 – 생명의 증표 (Dialogue Theater – Sign of Life)’는 영화감독 카와세 나오미(Kawase Naomi)가 기획·프로듀스한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의 시그니처 파빌리온 중 하나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대화’를 예술적 매개로 세계 곳곳의 분쟁과 분열을 조명하고 치유를 모색하는 실험의 장을 목표로 하는데요. 매일 엑스포 현장에서 서로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10분간 즉흥 대화를 나누고, 이를 관람객들이 마치 영화를 보듯 지켜보는 참여형 공연-전시입니다. 이 파빌리온은 ‘인류 역사상 매일 처음 맞이하는 대화’라는 콘셉트로 기획되어, 인종·종교·문화 등의 차이로 인한 분단을 대화의 힘으로 극복해보려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대화 극장 ⓒNippon.com

대화 극장의 공연 형식은 영화 상영과 토론회를 결합한 독특한 형태입니다. 하루 10회씩, 엑스포 전시 기간인 184일동안 총 1,840회의 대화 세션이 계획되어 있으며, 매 회마다 주제가 달라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각 세션의 진행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관객 참가자 선정
    파빌리온에 입장한 관람객들에게는 그날의 질문이 적힌 대화 카드가 주어지며, 무작위로 한 명이 대화자로 선정됩니다. 선정된 관람객은 안내에 따라 준비된 무대로 이동합니다.

  2. 1대1 대화 퍼포먼스
    무대에 오른 관람객 대화자는 스크린을 통해 등장하는 또 다른 대화자와 마주합니다. 이 두 사람은 사전에 정해진 하나의 질문 또는 주제에 대해 약 10분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화면 속 상대는 사전에 모집·훈련된 전 세계 참가자 중 한 명으로, 국적·문화적 배경이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이 즉흥 대화에는 어떠한 각본도 없으며, 그 자체로 한 편의 즉흥 영화처럼 전개됩니다. 관객들은 어둡게 조성된 객석에 앉아 두 사람의 생생한 대화를 영화 관람하듯 지켜보며,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3. 엔딩 영상 상영
    10분간의 대화가 끝나면 곧바로 엔딩 무비가 상영됩니다. 이는 카와세 나오미 총감독과 세계 6개국의 감독들이 특별 제작한 6편의 단편 영상 중 하나로, 방금 무대에서 벌어진 대화의 의미를 관객이 되새겨볼 수 있도록 구성된 작품입니다. 엔딩 영상은 매회 무작위 한 편이 재생되며, 관객들은 이를 감상하며 자신이 목격한 대화의 내용을 곱씹어 보게 됩니다.

  4. 사색과 소통
    상영이 모두 끝나면 관객들은 극장을 나서 ‘숲 속 집회소’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이곳은 통유리로 된 개방적 휴게 공간으로, 자연 채광을 받으며 방금 본 대화에 대한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하거나 혼자 사색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관객들은 자유롭게 머물며 타인과 의견을 나누거나 조용히 자신의 내면과 대화함으로써, 이번 체험을 통해 얻은 영감을 현실 세계의 자신에게 연결짓는 시간을 갖습니다.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1,840편의 즉석 드라마를 통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이해와 공감을 형성해 가는지 현장 예술의 형태로 보여주는 시도라고 이래할 수 있습니다.

대화 극장의 1대1 대화 퍼포먼스 ⓒNaomi Kawase

나오미 감독은 대화극장을 통해 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정짓는가, 왜 적과 아군으로 나뉘어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분열과 대립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이에 대한 해법으로 ‘대화’라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에 주목했습니다. 

“전쟁이나 분단을 힘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고 나의 안에 그들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곧 상대를 이해하고 내면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한 공존과 생명 존중이 가능하다는 그녀의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대화극장의 대화 세션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요. 그녀는 매일 주어지는 하나의 질문이 낯선 두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특히 매일 무작위로 주어지는 질문들의 내용이 인상적인데요.

‘최근에 당신은 어떤 색깔입니까?(最近、あなたは何色ですか?)’

‘해도 되는 거짓말과 해서는 안 되는 거짓말의 경계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ついていい嘘とついてはいけない嘘の境目はどこにあると思いますか?)’ 

대화극장 ⓒKawase Naomi, Solso

대화극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와세 나오미가 감독을 맡은 영화의 세계관과 연출 스타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와세 나오미는 데뷔 이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현 지역을 기반으로 현실의 인간 경험을 깊이 있게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것으로 유명한데요. 숲의 소리(萌の朱雀, 1997), 애도의 숲(殯の森, 2007), 두 번째 창문(2つ目の窓, 2014), 앙: 단팥 인생 이야기(あん, 2015), 비전(Vision,2018) 등 그녀의 대표작은 공통적으로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 세대와 세대 간의 교감 등 ‘생명’의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하는 작품들입니다.

특히 현실에 뿌리내린 인물과 풍경, 즉흥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다큐멘터리적 기법과 서정적 연출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데요. 이러한 그녀의 영화적 성향은 대화극장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특히 대본 없이 진행되는 1대1의 즉흥 대화의 형식은 ‘뜰에 나가다’와 같은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녀가 즐겨 활용하는 ‘날 것의 현실 담아내기’ 방식을 연상시키는데요. 

기술적인 면에서도 영화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화극장의 공간은 계단식 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를 보는 듯한 경험을 줍니다. 실제로 대화 세션 후에 엔딩 크레딧 대신 특별 제작 영상을 상영하는 연출은 영화 관람의 형식을 차용한 것인데요. 이에 대해 카와세 나오미 감독은 자신의 파빌리온을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듯한 대화 체험’으로 구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대화극장은 엑스포라는 형식을 빌려 그녀가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 연출한 하나의 거대한 라이브 영화이며,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테마와 미학이 새로운 형태로 구현된 작품인 것입니다. 

대화극장 유니폼 ⓒTakuya Nimonji (SABFA)

나오미 감독은 대화극장을 기획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화극장의 로고에도 대화를 상징하는 말풍선과 조명을 표현한 스포트라이트 아이콘을 조합하여 ‘대화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 빛을 비춘다’는 개념을 담았고, 실제 공간에서도 무대 위의 한 사람을 조명으로 강조하는 연출을 했는데요. 

이 로고를 활용해서, 텍스타일 브랜드 미나 페르호넨(minä perhonen)의 설립자 미나가와 아키라(Akira Minagawa)가 디자인한 유니폼도 눈에 띄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에 대해 미나가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가네코 미스즈(金子みすゞ)의 시집 『모두 다르고, 모두 괜찮아(みんな違って、みんないい)』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 따뜻한 기운이 카와세 나오미 감독의 파빌리온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다면 참 멋질 것 같아요. 유니폼 디자인은 테마를 상징하는 말풍선 아이콘이 테마 컬러인 노란색 하늘 위를 떠다니는 아주 단순한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대화라는 건 얼핏 쉬워 보이지만, 실은 아주 어렵고, 그렇기에 또 아주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고, 그것 역시 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 ‘실험의 장’이 조금이라도 더 즐겁고 열린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유니폼을 디자인했습니다.”

유니폼 뿐만 아니라, 대화극장의 또 다른 파트너인 시세이도는 미나 페르호넨의 디자인과 어울리는 헤어와 메이크업 ‘대화의 아름다움(Dialogue Beauty)’을 개발했습니다. 이에 대해 시세이도의 수석 헤어 메이크업 디렉터 케라 히로후미(KERA Hirofumi)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지금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창업 정신인 ‘만물자생(万物資生)’으로 다시 돌아가서,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자연과 사회를 아름다움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시세이도 내에서도 특히 새로운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뷰티 크리에이션 센터가 ‘Dialogue Beauty’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구 호소미 초등학교 나카데 분교 ⓒKawase Naomi, 2025 Osaka-Kansai Expo
폐교 건물을 해체한 모습 ⓒKawase Naomi, 2025 Osaka-Kansai Expo

대화극장은 무엇보다도 엑스포라는 가장 세계적인 행사에서 가장 지역적인 가치를 다층적으로 드러내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화극장의 건축에 일본 지역사회의 실제 유산을 가져와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전시관은 나라현 도츠카와무라(奈良県 十津川村)에 있던 구 오리타테 중학교와 교토부 후쿠치야마시(京都府 福知山市) 미와정의 구 호소미 초등학교 나카데 분교라는 두 개의 목조 폐교 건물을 해체하여 이전한 뒤, 엑스포 회장에 결합·재건축한 것인데요. 단순히 외형만 본뜬 것이 아니라 실제 건물 자재와 구조물을 옮겨와 현장에서 다시 조립했기 때문에, 파빌리온 곳곳에는 과거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남긴 낙서나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옛 교정에 서 있던 수령 100년, 높이 12.5m에 달하는 은행나무 한 그루도 통째로 이식하여 파빌리온의 상징적 중심에 심었는데, 이 나무는 원래 이전 과정에서 벌목될 예정이었으나 카와세 나오미 감독의 꿈에 나타나 ‘날 자르지 말아달라’는 계시를 준 덕분에 살아남아 옮겨졌다는 일화가 있는데요. 이외에도 나라나 교토에 자생하는 식물, 폐교사의 벽에 붙어서 자라던 우거진 아이비 등을 이식해서 정원을 대화극장의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대화 극장 ⓒNippon.com
대화 극장 ⓒNippon.com

대화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한 안부 인사, 메신저의 한 줄, 눈을 맞추며 건네는 한마디도 대화라고 할 수 있어요. 대화극장이 보여주는 건 언어의 완성도가 아니라, 관계가 생겨나는 가능성입니다. 어쩌면 이 극장은 하나의 영화라기보다, 매일 조금씩 써내려가는 삶의 시나리오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 안에서 날마다 다른 역할로 등장하고, 매일 다른 문장을 대화를 통해 함께 완성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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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에서 시작되는

한 그릇에서 시작되는

혼자 먹는 밥은 편하지만, 기억에 남는 식사는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의 집에서 함께 찌개를 끓여 먹거나, 여행지 골목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커피 한잔을 나누는 일처럼요. 한 그릇의 음식은 그렇게 순간을 함께 살아낸 기억이 되고, 낯설었던 사람과도 마음을 열게 만드는 자리가 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 앞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일은 생존을 넘어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방식이었고, 온갖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한 그릇의 식사에는 여전히 관계를 시작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에는 사무실과 식당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레스토랑 사식당(社食堂)을 소개합니다.

사식당의 입구 ⓒMizuho Kuwata

사식당(社食堂, Shashokudo)’은 일본의 건축 스튜디오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가 2017년 4월 도쿄 시부야에 오픈한 독특한 복합공간입니다. 29년 된 주택 지하를 개조하여 만든 이곳은 건축사무소와 카페 겸 레스토랑이 하나로 융합된 장소인데요. 사식당이라는 이름은 ‘사원(社員)과 사회(社会)를 위한 식당(食堂)’이라는 뜻으로, 직원을 위한 구내 식당인 동시에 동네 주민에게 개방된 공공 식당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Suppose Design Office)는 타니지리 마코토(Tanijiri Makoto)와 요시다 아이(Yoshida Ai)가 공동으로 설립한 건축 스튜디오인데요. 낫어호텔(Not A Hotel), 오노미치 U2(Onomichi U2), 블루보틀 다이칸야마 등 디자인 업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공간들을 디자인했습니다. 

특히 공동창업자인 타니지리 마코토는 건축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분야로 비즈니스를 확장하는 기업가이기도 한데요.  건축과 디자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웹 미디어 ‘텍처 매거진(Tecture Magazine)’을 비롯해,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담은 주택 브랜드 ‘야도 하우스(Yado House)’, 자연과 결합된 복합체류시설을 통해 지역을 브랜딩하는 회사 ‘다이치(Daichi)’,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의 가치를 담아 부동산 개발의 모든 과정을 관리하는 ‘절경부동산(絶景不動産, Zekkei Properties)’과 현대 기술을 활용해 토지의 미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미에텔(Mietell)’까지. 단순히 영역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 뿐만 아니라, 고객의 관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참신한 기획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낫어호텔 나스 ⓒHasegawa Kenta
Tokyo Toilet Project의 일환으로 진행한 센다가야 역 공중화장실 ⓒHasegawa Kenta
해운 창고를 리모델링한 복합공간 Onomichi U2 ⓒ矢野 紀行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는 분야에 상관없이 늘 ‘왜 당연히 그래야하지?’ 라는 의문들에 정면으로 도전해왔습니다. 타지니리 마코토는 ‘건축가인 동시에 기업가’라는 벤처 정신으로 기존 관습을 혁신하려는 태도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좋은 것은 계승하되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적극 수용해야 합니다. ‘레스토랑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 갇힌 사람은 결코 새로운 레스토랑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항상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을 돌려야 발전할 수 있어요.” 

사식당 프로젝트도 건축 업계의 전통적인 업무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건축 스튜디오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야근과 과로, 편의점 도시락이나 인스턴트 음식에 의존하는 생활로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타지니리와 요시다는 바쁜 직원들이 즉석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다 건강을 잃지 않도록, 몸에 좋은 것을 먹게 해주고 싶다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직원이 아닌 사람도 부담 없이 사무실에 와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볼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도 이전부터 꾸준히 제시되고 있었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직원들이 함께 식사할 기회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사식당을 본격적으로 오픈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소수 인원이 자연스럽게 같이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일과 무관한 대화도 나누고 편안하게 소통이 이루어졌지만, 직원 수가 늘어나면서 모두가 한 식당에 모이기 어렵고 예약이나 일정 조율에 번거로움이 생겼습니다. 타지니리와 요시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오피스 안에 식당을 만들어버리자’

사식당의 주방 ⓒSuppose Design Office

결론적으로 사식당이라는 이름처럼 ‘직원과 사회의 건강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기획 의도가 되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인데 정작 직원들이 소모되고 불행해진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맛있는 식사와 쾌적한 작업환경으로 팀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선순환을 만들고자 했는데요. 건강한 식사가 건강한 세포를 만들고, 건강한 세포가 건강한 사고를 디자인한다는 철학 아래, 회사 내부에 식당을 들여와 직원들의 식생활을 개선하고 업무 효율과 창의력을 높이는 것이 사식당의 목표입니다.

동시에 이 실험적인 공간을 통해 ‘우리 회사는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일한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명확히 드러내는 것도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식당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의 포트폴리오이자 매니페스토 역할을 하는 공간인 셈인데요. 젊은 사람들이 근무 환경과 조직 문화에도 눈을 돌리는 시대에, 회사가 추구하는 바를 공간으로 보여줌으로써 업계 인재들에게도 어필하고자 했습니다. 

사식당의 메뉴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의 밀키트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의 온라인 스토어에 판매하는 식재료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은 풀타임 셰프와 바리스타, 스태프들에 의해 실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타니지리의 지인이 메인 셰프로 합류했고, 공모를 통해 고용된 직원들이 주방과 홀을 맡고 있습니다. 평일 낮에는 주변 직장인들과 주민들이 점심을 먹으러 오고, 저녁에는 간단한 주류도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의 공간입니다. 

대표 메뉴는 매일 바뀌는 정식으로, 신선한 제철 재료를 활용한 건강한 가정식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합니다. 직원들과 손님들의 영양을 고려해서 메뉴 구성에는 항상 야채 위주의 균형 잡힌 요리를 넣는 것이 원칙인데요. 예를 들면 고기와 생선 중 선택할 수 있는 일일 정식에는 세 가지 반찬과 밥, 국이 함께 나오는 식입니다. 이러한 식단은 직원들이 바쁜 업무 중에도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으며 건강을 유지하도록 돕는 동시에, 지역 주민들에게도 집밥 같은 영양식을 제공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 대형 책장 옆에는 핸드드립 커피 스탠드가 있어, 스페셜티 원두로 내린 향긋한 커피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원두는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가 사식당으로 본사를 옮기기 전에 위치하고 있었던 히로시마 미야지마 지역의 유명 로스터리와 협업해 만든 “Suppose Coffee” 블렌드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온라인을 통해서 시그니처 원두 뿐만 아니라 사식당의 메뉴로 만든 밀키트, 요리에 사용되는 식재료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사식당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의 서가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의 업무공간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의 공간은 사무실과 식당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고 섞여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직원 전용 구역에 ‘출입 금지’ 딱지가 붙어있는 딱딱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요. 오히려 일반 손님들 옆에서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점심을 먹고, 동료나 협력사가 바로 옆 테이블에서 도면을 펼쳐두고 미팅을 진행하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실제로 ‘외부인이 있어 식사 소리, 커피 향이 나는 편이 오히려 딱딱한 오피스보다 출근이 즐거워진다’는 직원들의 반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심에는 사각 형태로 배치된 대형 아일랜드 키친이 있어 쉐프와 직원들이 음식을 준비합니다. 이 주방을 경계로 입구 측 앞부분에는 식당 좌석과 카페 테이블, 서점과 갤러리, 물품 판매 공간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대형 책장에는 건축계 큐레이터 하바 요시타카(幅允孝, Haba Yoshitaka)가 선별한 건축 서적부터 잡지, 동화책까지 폭넓은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손님들은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좌석으로 가져가 볼 수 있고, 책장 너머 벽에는 사진작가 와카기 신고(若木信吾, Wakagi Shingo)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에서 자체 개발한 가구나 제품도 비치되어 있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식당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은 서포즈 디자인 오피스의 다른 사업과 커뮤니티 활동의 거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 공간에는 앞서 소개한 신사업 중 하나인 ‘절경부동산(絶景不動産)’의 사무실과 사진작가 와카기 신고의 크리에이티브 오피스 ‘영트리 프레스(Youngtree Press)’도 이곳에 함께 있는데요. 한편으로 일반 손님을 위한 이벤트나 워크숍, 전시도 활발히 열고 있습니다. 출판사 북 페어, 현지 식재료 생산자를 초청한 팝업 마켓, 지역 예술인의 소규모 전시회 등이 열리는 동네의 문화 플랫폼으로도 기능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유명 드라마나 매체의 촬영지로 쓰이며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는데, 인기 드라마「고독한 미식가」의 에피소드 촬영지로 등장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식당을 매개로 지역 사회 주민, 타 업계 크리에이터, 방문객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교류하는 것이 사식당이 추구하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이기도 합니다.

사식당 ⓒSuppose Design Office

사식당은 지역 사회와 관계 맺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무실이 빌딩의 위층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면한 반지하 공간을 밝은 식당으로 꾸며 이웃들에게 여는 것만으로도, 동네 주민들이 직원들을 친숙하게 느끼고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브루투스(Brutus) 매거진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사식당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인해, 회사 내부 뿐만아니라 거리와의 관계도 확실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음식에서부터 일하는 방식, 지역 사회와의 접점까지 사식당의 틀은 확장되고 있다”

다시말해, 일하는 공간과 지역이 경계없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모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2017년에 사식당이 오픈한 후에 2018년 가마쿠라시에 지역 직장인을 위한 ‘거리의 직원 식당(まちの社員食堂)’이 문을 여는 등 커뮤니티형 식당에 대한 아이디어가 일본 각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사식당이 이러한 흐름에 직접 영향을 주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직원과 사회 모두를 위한 식당’이라는 컨셉은 현대 일본 사회에서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타니지리와 요시다는 업무와 생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동거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며, 앞으로도 사식당과 같은 실험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직원들이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하는 모습에서 출발한 이 공간은 어느새 회사 안팎의 사람들을 잇는 식탁이 되었습니다. 한 그릇의 식사가 만든 여유는 긴장감이 낮은 분위기를 만들고, 도시의 고립된 관계에 작지만 분명한 균열을 냅니다. 말 대신 식사를 건네는 방식으로 말이죠. 

오늘은 누구와 식탁을 나누고 싶나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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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연약한 가능성이라도

비록 연약한 가능성이라도

바다는 언제나 가능성의 생태계였습니다. 수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 미처 빛을 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것들이 쌓여 있는 곳이지요. 작고 얇고 연약한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시간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가능성들을 너무 쉽게 지나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나,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잔해에서도 아직 꺼지지 않은 생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이번 주에는 버려지는 해초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Less, Light, Local’소개합니다

Less, Light, Local ⓒWE+

‘Less, Light, Local(이하 LLL)’은 일본의 위플러스(WE+)가 기획한 연구 기반 디자인 프로젝트 입니다. ‘Less, Light, Local’이라는 이름은 적게(Less) 소비하고 가볍게(Light) 설계하며 지역(Local) 자원을 활용하겠다는 철학 아래에서, 해조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핵심인데요.

위플러스(WE+)는 2013년 도쿄에서 설립된 디자인 스튜디오로, 일상 속 자연 현상과 전통적 가치에 착안한 대안적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물, 바람, 빛과 같은 자연 현상을 새로운 재료를 통해 감각적으로 포착하거나, 도시의 폐자원을 주제로 하는 실험적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위플러스는 일본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다양한 해조류의 새로운 잠재력을 탐색했고, 그 중 이타노리에 주목하여 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유리, 세라믹, 콘크리트, 폐기물 등 재질별로 분류하기 어려운 잔류 폐기물을 재료로 활용하는 'Remians' 프로젝트 ⓒWE+
상업용 건물 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건축 폐자재를 활용하여 리빙 제품을 만드는 'Link' 프로젝트 ⓒWE+
초신수성 코팅 재료를 사용하여 아침 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을 통해 빛을 포착하고 반사하는 조명 시스템 'Cuddle' ⓒWE+

이타노리(ITA NORI, 판김)는 전통적으로 스시나 오니기리(주먹밥)를 싸는 데 쓰이는 김의 일종으로, 전통적으로 간을 하지 않은 네모난 형태의 건조된 해조류 시트인데요. 일본이 세계 최대의 해조류 소비국인 만큼 다양한 종류의 식용 해조류를 가공해왔는데, 그 중 이타노리는 에도 시대(1603~1868)에 일본 전통 한지 제조 기법을 응용하여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나무 발로 해조를 뜬 뒤 말리는 방식은 종이뜨기와 유사하여, 김 생산 과정 자체가 일본의 공예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기후 변화로 바닷물 온도가 상승하고 해양 생태계가 변하면서, 일부 양식 해조류는 충분한 영양을 얻지 못해 빛이 바래거나 얇게 자라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상품성이 없는 이러한 해조들은 상당량이 식품 유통에서 제외되어 소각 폐기되는데, LLL 프로젝트는 이렇게 버려지는 김에 미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해양 폐기물의 처리 문제와 지역 자원의 활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함께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이타노리를 채취하는 현장 ⓒWE+
폐기되는 다양한 종류의 이타노리 ⓒWE+
이타노리를 활용하는 방식의 테스트 과정 ⓒWE+

위플러스는 이타노리 소재의 얇고 질긴 섬유질 구조에 주목했습니다. 한지 제작에서 유래한 해조 시트인 만큼 재료 자체의 잠재력이 높다고 보고, 별도의 화학 가공 없이도 해조류만으로 물성을 형성하는 실험을 계속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해조 섬유질을 그대로 건조한 시트는 독특한 질감과 은은한 광택을 지니는데, 여기에 천연 풀(녹말 등)을 소량 결합하면 소재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해조류만으로도 종이나 목재와 같은 다목적 자재로 활용될 수 있으며, 친환경 접착제 등을 병행하면 실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이타노리를 종이의 대체재로서 응용하는 방안을 탐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퇴색된 김 시트 특유의 색상과 질감의 변화를 디자인 요소로 삼아 격자무늬 한지창(쇼지)처럼 조명 패널을 구성하고, 때로는 김 시트를 원형 등 기하학적인 모듈로 잘라 와이어에 매다는 등의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 소재를 형태별로 결합하는 데에 있어서는, 일본 전통 건축에서 빛을 산란시키는 와시지(和紙紙)나 쇼지문의 구성 원리에서 착안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프로토타입들은 벽걸이형 조명판, 입체적 조명 상자, 천장에 매다는 모빌의 형태를 통해 경량성과 반투명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Less, Light, Local ⓒWE+
Less, Light, Local ⓒWE+
Less, Light, Local ⓒWE+

아라카와 & 컴퍼니(Arakawa & Co., Ltd.)는 LLL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 중 하나입니다. 아라카와는 1975년에 개발한 와이어 걸이 장치 “아라카와 그립(ARAKAWA GRIP)” 으로 유명한 일본 기업으로, 이 기술은 전세계의 미술관과 전시 공간에서 널리 쓰이는 와이어 서스펜션 시스템인데요. 아라카와는 설치와 조명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이타노리라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는 위플러스의 연구 프로젝트에 협업하였으며, 이 프로젝트를 창립 50주년 기념 프로그램인 50 GRIPS의 하나로 지원했습니다. 

아라카와 그립은 얇은 금속 와이어와 특수 잠금장치를 이용해 다양한 재료를 공중에 고정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별도의 나사나 프레임 없이도 손쉽게 위치 조정과 고정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와이어 서스펜션 기술은 일반적으로 유리, 목재, 아크릴판 등을 전시할 때 쓰이는데, 위플러스는 이 기술에 버려진 해조 시트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얇고 넓은 김 시트를 와이어로 잡아당기거나 매달 경우 장력에 견딜 수 있을까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타노리는 생각 이상으로 질긴 특성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유연하게 휘어지는 곡선미를 연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팀은 아라카와 그립의 미세한 높이 조절 기능을 활용해 이타노리 조각들의 밀집도와 겹치는 정도를 세밀하게 조정해서, 빛에 따라 투명도와 색감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연구했는데요. 예를 들어 여러 장의 이타노리를 겹친 부분은 짙은 녹갈색의 불투명 면을 이루고, 한 겹만 있는 부분은 밝은 초록빛으로 반투명하게 빛을 투과하는 식입니다. 

아라카와 이외에도 쇼지(Shoji) 전문 기업인 키토테(KITOTE), 산업용 메쉬 전문 기업 NBC 메쉬텍(NBC Meshtec) 등의 기업이 소재와 기술 측면에서 참여했고, 일본 수산업 협동조합연합회 등 해양 관련 단체의 후원을 통해 밀도 높은 프로젝트로 완성되었습니다.

아라카와 그립을 활용한 디테일ⓒWE+
아라카와 그립을 활용한 디테일ⓒWE+

Less, Light, Local 프로젝트는 지역의 잉여자원을 아름답고 실용적인 형태로 만들어 다른 가치로 치환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전통 종이 공예에서 비롯된 김 제조법을 현대적인 소재의 실험으로까지 발전시킨 맥락은, 지역 문화유산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요. 일본은 해조류 생산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식품 이외의 활용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해조 폐기물의 잠재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도 마찬자가지입니다.

특정한 산업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던 가공기술을 건축자재나 제품소재로 응용하는 것은 분야의 경계를 뛰어 넘어 자원을 활용하는 시도가 늘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잠재력을 보여줍니다. 위플러스 역시 앞으로 해조 기반 소재를 더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한지나 가죽 을 대체할 친환경 신소재를 선보이겠다는 비전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의 최근 동향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어서, 일회성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글로벌 단위의 지속가능한 디자인 운동의 경향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2025 마드리드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조르지 페냐데스(Jorge Penadés)가 버려지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를 사용한 가구를 만드는 Uprooted 프로젝트나, 네덜란드의 휴먼 머티리얼 루프(Human Material Loop)가 미용실에서 버려지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Human Hair Sweater와 같은 프로젝트도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지역의 이슈를 찾아내고, 그것을 일상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시도들은 이제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 뿌리로 만든 의자 ⓒAsier Rua
머리카락으로 만든 스웨터 ⓒSchwarzkopf Professional

결국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거창한 기술이나 눈에 띄는 혁신이 아닐지 모릅니다. 지나치기 쉬운 것들, 세상의 기대에도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새로운 생태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합니다. 

하지만 세계는 언제나 그런 것들 위에 쌓여 왔습니다. 관심의 그늘에 있는 작고 연약한 가능성들이, 언젠가 가장 단단한 세계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작은 가능성 앞에 다시 멈춰서기 위해서는, 사라지는 것들의 속도를 따라갈 인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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