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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할 수 있는 관계

지속할 수 있는 관계

이케선 파크 ⓒMedia Surf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고,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관계의 중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다.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어렵지만, 맺어진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훨씬 어렵다. 그렇지만 서로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지속가능한 관계라는 말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번 주에는 관계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동네의 장소 ‘이케선 파크(Ike-sun Park)’를 소개한다.

이케선 파크 ⓒForward Stroke inc.

지역에서 공공과 민간의 이해관계는 표면적으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공공은 공익의 실현이라는 명분 아래, 지역의 소득 일부를 취해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민간은 최대 이윤의 실현을 위해,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을 탐구한다. 이렇게나 다른 두 입장이 만나, 어떻게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를 통해 공익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중 하나가 ‘민간 자금을 활용한 공원 정비 기법(Park-PFI)’ 이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도시화가 진행된 국가들, 특히 일본에서는 이미 제도화되어 시행중인 것으로, Park-PFI를 통해 만들어진 공원이 지역 곳곳에서 잘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국토교통성의 주도로 1960년대부터 도시 내에 공원들을 꾸준히 건설해왔다. 반 세기 넘는 시간 동안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공원들은 동네의 풍경을 바꿔놓았지만, 한정된 공공의 예산으로 넓은 면적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구조의 한계점도 드러났다. 공공의 힘만으로 높아지는 시민의 의식 수준과 지역의 맥락과 수요에 맞는 매력적인 공원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민간 자금을 활용하여 공원의 개발과 정비를 추진하는 Park-PFI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제도의 핵심은 공모를 통해 선정한 민간 사업자가 공원 내에 수익 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되, 수익의 일정 비율을 공원 정비에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공의 입장에서는 공원 유지관리비의 부담을 덜면서도, 질 높은 공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민간의 입장에서는 공원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을 얻게 된다.

Park-PFI의 흥미로운 점은 ‘더 나은 도시 생활의 영위’라는 정성적인 목표를 아주 구체적인 법령으로 환산해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수익 시설이라고 해서 무작정 가능한 것은 아니다. 민간 사업자가 제안하는 수익 시설이 ‘도시 공원 이용자의 편의성 향상을 도모하는 데 효과적인 시설’인지를 공원 관리 위원회를 통해 검토하여 결정한다. 이를테면 ‘지붕이 달린 광장’이나 ‘높은 개방성을 가진 공간’을 만들면 추가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식이다. 여기에 더해, 각 지역의 실정과 수요에 맞는 공원이 만들어질 수 있게 지자체마다 조례를 추가할 수 있는 여지를 둔 점도 인상적이다. 제도가 단순히 잘 굴러가는 것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효용이 발생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Park-PFI의 대상이 되는 공원이 정해지면, 공모를 열기 전에 공공은 ‘마켓 사운딩(Market Sounding)’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획 과정을 거친다. 말 그대로 시장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계층인지,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어떤 형태인지, 어떤 공원을 원하는지, 공원 부지를 통해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시설은 어떤 것인지 등 광범위한 조사를 벌인다. 조사의 결과는 나중에 참여하게 될 민간 사업자가 공원의 컨셉과 방향성을 설정할 때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케선 파크 ⓒForward Stroke inc.
이케선 파크 ⓒMedia Surf

2020년 여름, 도쿄 이케부쿠로에 문을 연 이케선 파크 역시 Park-PFI를 통해 탄생한 공원이다. 2014년 도시마구가 도쿄 23개 구 중 유일하게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마을에 대한 본격적인 정비가 시작되었다.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기 위한 큰 전략 중 하나가 도시마구의 중심지인 이케부쿠로에 공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도쿄 올림픽 개최 전까지 이케부쿠로 역 주변에 총 4개의 공원을 조성하여 예술 극장이 있는 서쪽 지역과 애니메이션의 성지라고 불리는 동쪽 지역을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4개의 공원 중에서 3개는 기존에 있던 공원을 재정비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인 이케선 파크는 과거 조폐국이 있던 부지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초기 기획 단계부터 운영을 염두에 두다보니 공원을 기획하고 설계, 관리운영까지 모두 도맡아 할 수 있는 사업자를 선정했다. 

이케선 파크의 가장 큰 특징은 방재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도시마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고, 주택이 밀집된 곳에 면하고 있어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역의 재난 대피 장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평상시에는 아이들이 뛰어 노는 잔디밭을 비상시에는 헬기 착륙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뿐만 아니라 소화 용수 확보를 위한 설비를 설치하고, 불이 잘 붙지 않는 나무를 심고, 산책로를 통해 비상 차량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역의 핵심적인 방재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케선 파크 ⓒIKESUN PARK

공원의 전체적인 테마는 ‘거리를 바꾸는 공원’으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문화가 다시 동네의 거리로 퍼져나가, 살기 좋은 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공원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이케선 파크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삼는 것은 ‘풍부한 식음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휴식 시간 없이 운영되는 카페-레스토랑 ‘EAT GOOD PLACE’와  실험적인 메뉴들을 선보이는 음식 스타트업들이 늘어선 ‘KOTO PORT’, 주말마다 열리는 파머스 마켓과 주민들이 식재료를 직접 재배할 수 있는 커뮤니티 가든까지.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식체험을 추구하는 F&B 콘텐츠들과 광활한 면적의 공원이 만나 지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EAT GOOD PLACE ⓒKozo Takayama
EAT GOOD PLACE ⓒForward Stroke inc.
EAT GOOD PLACE ⓒForward Stroke inc.

EAT GOOD PLACE는 다양한 F&B 브랜드를 운영하는 Epietriz가 이케선 파크의 비전에 맞게 개발한 새로운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잘 먹는 것, 내지는 좋은 것을 먹는 것 정도로 이해되는 “EAT GOOD” 이라는 철학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식재료의 질을 중시하는 것도 그렇고, 먹고 마시는 것을 매개로 지역 내의 활동과 교류가 일어날 수 있는 장소로 기능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아침, 점심, 저녁 뿐만 아니라 평일, 주말, 금요일 저녁, 토요일 밤 등 일주일 내내 각기 다른 메뉴를 제안한다. 활동 시간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셈이다. 

EAT GOOD PLACE는 단순히 먹고 쉬는 공간이 아니라, 지역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반공공적(semi-public) 성격을 갖는다. 매장의 일부는 주민들을 위한 체험학습실로 운영한다. 이러한 부분에서도 상생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적용된다. 전체 공간 중에서 체험학습실로 사용할 수 있는 매장 면적에 해당하는 만큼의 임대료가 면제된다. 공공은 민간의 자본으로 지역에 필요한 공간을 얻을 수 있고, 민간은 더 넓은 좌석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임대료의 부담을 덜 수 있다. 또한 Park-PFI의 제도에 따라 카페 수익의 일부는 공원의 시설과 조경을 유지관리하는 비용으로 사용된다. 지속가능한 관계의 좋은 힌트가 되는 지점들이다.

 
KOTO PORT ⓒNaoto Date
KOTO PORT ⓒIKESUN PARK
KOTO PORT ⓒIKESUN PARK

도로에 면한 공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선 소형 점포인 ‘KOTO PORT’ 도 거리와 공원에 활기를 더하는 요소다.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메뉴를 실험하고 싶은 소규모의 가게들이 입점하고 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푸드 트럭을 떠올릴 수 있지만, 가게 하나하나의 밀도가 기대 이상이다. 

도넛과 과일 음료를 페어링해 서비스하는 ‘HIGUMA Doughtnuts X SOUR’ 의 카스가이 준은 “공원 옆에서 가게를 열고 싶다는 생각은 시작할 때부터 있었어요. 저도 아이가 있어서 알고 있지만, 동네의 공원에서 가족과 단란하게 보내는 시간 만큼 안심하는 때는 없어요. 그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안식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라는 말로 자신의 가게를 소개한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상냥한 공원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알고 지내던 SOUR와 협업해 공원에 앉아 간단히 즐길 수 있는 과일 주스와 도넛을 세트로 하는 메뉴를 개발했다. 

아마테라스 ⓒIKESUN PARK

이케부쿠로의 유명한 주점 중 하나인 ‘아마테라스’를 개업해 9년째 운영중인 테츠로는 ‘거리를 바꾸는 공원’이라는 이케선 파크의 비전에 공감해 출점을 결심했다. 공원에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전통주를 스파클링으로 서비스하는 ‘아와(거품)테라스’ 를 KOTO PORT에 개점했다. 도쿄에서 제일이라고 평가받는 아마테라스의 시그니처 전통주 ‘이마지마’를 필두로, 연결된 양조장과 협업해 이케선 파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리미티드 에디션도 개발하고 있다. 술 한잔과 곁들일 수 있는 간단한 튀김류를 함께 내준다. 이외에도 베트남인 거주 비율이 높은 이케부쿠로의 지역성을 더 살리고 싶어하는 반미 전문점과, 남미 여행에서 만난 산장의 풍경을 재현하고 싶어 문을 연 스파이스 커리 가게 등 공원과 음식에 진심인 사람들이 만드는 이케선 파크는 방문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이케선 파크 ⓒMedia Surf

건강한 시스템을 발판삼아 공원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원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우리네 근처에 있는 공원들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케선 파크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공원이라는 공공재를 단순히 나무와 산책로, 벤치와 운동기구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 동네에서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복합적인 장소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감대를 갖는 것. 두 번째는 공원을 잘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잘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을 다지는 것. 두 가지 모두 지속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다. 비단 지역에서 공원을 만드는 일이 아니더라도, 당장의 성과보다 관계를 설정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EVERY WEEK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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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

어쨌든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다못해 동네의 카페에 부러 몸을 앉히는 일에서도, 자신만의 범위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느슨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영향을 끼칠 만한 대상이 자신의 생활 반경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는다.

소위 님비(NIMBY)로 명명되는 현상은 이러한 거부감이 집단화되면서 표출된다. 님비의 대상이 되는 일련의 공간들은 일반적으로 동네의 토지 또는 주택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정당화된다. 문제는 혐오의 시선이 공간 자체가 아니라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맺혀 있다는 점이다. 비슷한 소득 범위, 의식 수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에서 얻어지는 가치를 다양성이라는 명분 아래 펼쳐지는 일들에 양보하고 싶지 않은 본능이다.

하지만 저성장,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도시의 고밀화가 지속됨에 따라서 사회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은 더 이상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취향이나 가치관의 문제를 벗어나고 있다. 이제는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사는 것을 전제로, 어떻게 지속가능한 공존의 방식을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번 주에는 다양성의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동네의 장소 ‘디콘리 베타니안(Deaconry Bethanien)’ 을 소개한다.

디콘리 베타니안 ⓒ Pablo Casals Aguirre

개신교의 사회 사업(Social Work)을 의미하는 디아코니(Diakonie)는 유럽 전역에 걸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영위하고 있다. 특히 독일의 디아코니는 독일 내 비영리 민간복지재단 중 가장 큰 규모로, 복지 강국으로 평가받는 독일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다. 독일의 복지 시스템의 출발과 역사를 같이 하고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1874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기반으로 시작한 디아코니 베타니안(Diakonie Bethanien, 이하 DB)은 1911년에 독립하여 스위스 취리히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DB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취리히에서 ‘현대의 집사’를 모토로 어린이 데이 케어, 아동 보호 및 부모 교육, 노인 요양 주택과 같은 사회 돌봄 서비스부터, 외식과 호텔 사업까지 전개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사업부가 사회와 취리히 시의 요구에 따라 개별적으로 확장하다 보니 취리히 전역에 걸쳐 파편화 되었다. 자연스레 데이 케어 센터는 어린이들, 노인 요양 주택은 노인들만을 위한 장소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에 DB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간이 고립된 시설이 아니라 도시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다양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거처를 찾기 시작했다. 2010년에 개인 클리닉을 매각한 자금으로 취리히 알트슈테텐(Altstetten) 지역의 부동산을 매입해 새로운 복합 공간을 기획하게 되었고, 2016년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집사들(Deaconry)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의 디콘리 베타니안(Deaconry Bethanien)이 탄생했다.

디콘리 베타니안 ⓒ Pablo Casals Aguirre
디콘리 베타니안 ⓒ Pablo Casals Aguirre
디콘리 베타니안 ⓒ Pablo Casals Aguirre

DB는 디콘리 베타니안을 그들의 철학을 발신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다양한 문화를 위한 기반’이라는 개념을 구현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성격의 공간들을 간결한 구조에 압축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들었다. 호텔, 레스토랑, 데이 케어 센터, 노인 요양 주택, 병원, 사무실, 회의실이 단일 건물 안에 모두 들어 있다. 모든 공간은 DB에서 보유하고 직접 운영한다. DB의 정신이 발현되는 오프라인 플랫폼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디콘리 베타니안의 로비 ⓒ Pablo Casals Aguirre

디콘리 베타니안에서 각기 다른 용도를 하나의 건물에서 기능하게 만드는 핵심은 수직적인 동선에 있다. 특히 각각의 용도에 맞는 방문객의 신체적, 정신적 특성이 상이한 경우에는 보다 높은 수준의 디자인을 요한다. 하지만 건물의 구성이 복잡해도 운영하는 주체가 하나라면 전제가 달라진다. 최소한의 디자인으로도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디콘리 베타니안의 1층 로비는 건물을 관통하는 열린 통로와 같다. 걸음이 서툰 아이와 휠체어에 몸을 맡긴 노인,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직장인, 여행용 짐가방을 끄는 관광객 모두가 쉽게 오갈 수 있는 적당한 무심함이 있는 공간이다. 닫혀 있는 안내 데스크가 아니라 간소한 테이블에서 방문객을 환대하고, 목적에 맞는 층으로 안내한다. 호텔 투숙객과 사무실 근무자를 위한 엘리베이터, 노인 요양주택과 어린이 보육 시설을 위한 엘리베이터, 평상시 호텔 직원들과 비상시 소방 대원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를 모두 별도의 입구로 분리하여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디콘리 베타니안의 창문 ⓒ Pablo Casals Aguirre
디콘리 베타니안의 창문 ⓒ Pablo Casals Aguirre
디콘리 베타니안의 창문 ⓒ Pablo Casals Aguirre

디콘리 베타니안의 건축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점은 창문이다. 모든 층에 있는 창문이 동일한 크기와 재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호텔과 노인 요양 주택, 어린이 보육 시설의 창문을 모두 똑같이 만든 건 DB의 의지에서 기인한다. DB의 고객은 이미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DB와 같이 사회 복지 사업을 하는 단체들의 도움이 없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디콘리 베타니안에서 만큼은 사회적인 지위에 상관 없이 누구나 동등한 질의 서비스와 공간을 누릴 수 있다. 요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노인과 호텔의 투숙객이 같은 눈높이에서 도심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의 의미를 창문 하나로 이야기하고 있다.

밖에서 본 디콘리 베타니안의 창문 ⓒ Pablo Casals Aguirre
안에서 본 디콘리 베타니안의 창문 ⓒ Pablo Casals Aguirre

창문의 시스템도 흥미롭다. 안에서 바깥의 풍경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각적인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는 창틀의 구조를 뒤집었다. 덕분에 안쪽에 작은 난간을 설치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이 더해졌고, 창문 전체가 옆으로 밀려나면서 완전히 열리는 형태가 완성됐다. 옆집의 창문과 부딪히지 않도록 열리는 방향도 교차하여 설계했다. 창문의 안쪽에는 창을 가로지르는 목재를 걸어 선반으로 쓰거나, 바닥의 턱을 높여 소파 형태로 만들어서 자신에게 맞는 자세와 시선으로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플라시드 호텔 ⓒ Pablo Casals Aguirre

정교하게 짜여진 디콘리 베타니안의 하드웨어를 채우는 DB의 브랜드들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플라시드 호텔(Placid Hotel)은 ‘디자인 & 라이프스타일’을 모토로 115개의 객실과 5개의 컨퍼런스 룸, 그리고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직접 객실과 부대시설을 디자인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넓은 선택지를 열어두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요양 시설에서 지내는 사람의 가족들, 취리히에 출장 온 사람들, 주말에 호캉스를 즐기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다채로운 객실 상품을 선보인다.

플라시드 호텔 ⓒ Pablo Casals Aguirre

1일, 3일, 7일, 30일 등 머무는 일 수와 인원 규모에 따라 침대의 타입과 객실에 비치된 가구, 어메니티를 세세하게 조정할 수 있다. 여러 개의 방을 예약할 경우에는 그룹 패키지로 가격 할인과 컨퍼런스 룸 예약 등 연계 서비스를 지원한다.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가족들과 주말을 보낼 수 있는 패밀리 스페셜 패키지를 제공한다. DB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보육 시설과 연계한 자녀와 부모가 함께 하는 워크샵, 자전거 무료 대여, 플라시드 테디 베어 인형, 취리히 동물원과 취리히의 현대 미술관 쿤스트하우스 입장권을 포함한다. 31개의 객실에는 휠체어 이용객을 위해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전동 침대가 제공된다.

플라시드 호텔 ⓒRasmus Norlander

호텔은 비즈니스를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력한 업무 지원 시설도 제공한다. 자유롭게 업무를 볼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호텔의 시설과 결합하여 운영한다. 평일 오전 6시 반부터 10시까지는 비어 있는 객실을 홈 오피스로 대여할 수 있고, 점심 시간에는 객실에서 낮잠을 자거나 화상 회의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어린이 보육 시설에서는 아이가 있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루 단위 위탁 서비스도 제공한다.

디콘리 베타니안 ⓒPablo Casals Aguirre

디콘리 베타니안을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의 연장으로 단정하기에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 복지 사업도 멋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 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모두를 위한 공간’을 지향하는 도시의 공간들이 진정 모두를 위하고 있는지를 곱씹어 볼 수 있는 힌트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도심과 달리 물리적인 공간의 한계가 있는 동네 단위의 비즈니스에게는 국지적인 유대의 가능성으로 치환될 수 있다. 어쨌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감각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구태의연한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기회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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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경계 틈에서

허물어진 경계 틈에서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경계를 허무는 일은 영역을 점유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이는 곧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대체로 갈등을 동반한다. 이러한 갈등은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아파트다. 담을 쌓고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구축해온 아파트 단지는 공공성을 위시한 도시와 지역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도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와 휴게 공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경계를 허물어 지역의 공공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과, 공동의 사유재산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들이 받는 차별, 택배 차량의 진입을 막아서 생겨나는 해프닝 등 미디어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이야기들의 기저에는 경계의 문제가 깔려 있다.

문제의 핵심은 영역을 소유하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인식 전환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경계를 허무는 일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번 주에는 지역과 호텔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실험의 장 ‘카페 카말레온(Cafe Camaleon)’ 을 소개한다.

카사 캠퍼 ⓒ 70percentpure

마요르카 지방 언어로 ‘농부’라는 뜻의 캠퍼 Camper는 1975년 스페인에서 시작된 신발 브랜드다. 캐주얼을 컨셉으로, 운동화와 구두 사이 어디쯤에 있는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인다. 집 앞에 편하게 신고 나갈 수 있는 슬리퍼부터, 근사한 넥타이를 곁들일 수 있는 가죽제화까지 다루는 제품군의 스펙트럼이 넓다. 카사 캠퍼 (Casa Camper)는 캠퍼가 운영하는 호텔이다. 2004년 바르셀로나를 시작으로 2009년에 베를린에도 문을 열었다.

왜 신발을 파는 기업이 호텔을 만들었을까?

 카사 캠퍼는 호텔의 모습을 하고 있는 쇼룸이다. 하나의 사업 전략으로 본다면 고객이 브랜드를 더 강력하게 경험할 수 있는 마케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발을 파는 회사는 신발의 교체 주기를 짧게 만들거나, 한 사람에게 여러개의 신발을 팔거나, 더 많은 사람이 신발을 사게끔 유도하는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캠퍼는 호텔을 선택했다. 호텔은 특별하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맞는 아침에는 피곤함이 없다. 호텔의 조식은 늘 먹던 음식인데도 더 신선하고 맛있게 느껴지고, 객실에 있는 볼펜마저도 근사해 보인다. 캠퍼는 호텔의 이런 지점들을 잘 포착했다.

특히 베를린의 카사 캠퍼는 고급 레스토랑과 캠퍼의 매장이 함께 시너지를 내는 구조를 만들었다. 덕분에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들이 활기 넘치는 로젠탈러 거리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하지만 호텔의 문을 연 지 10년이 넘은 시점에 도래한 유례없는 감염병의 시대는 호텔을 비롯한 관광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공간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요구했다. 카사 캠퍼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텔을 찾던 관광객은 자취를 감추었고, 주민들의 활동 반경이 집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호텔 앞 거리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카사 캠퍼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대응하기 위해, 호텔과 동네가 만나는 1층 공간 전체를 바꾸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불필요한 호텔의 로비 공간을 최소화 하고, 호텔에 묵지 않더라도 카사 캠퍼의 개성이 담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을 더했다. 식사 시간을 중심으로 운영하던 고급 레스토랑 대신에,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의 올데이 다이닝과 카페를 만들었다. 신발의 경계를 허물어 캐주얼의 새로운 정의를 써내려가는 캠퍼의 정신을 담은 카말레온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호텔의 로비 공간과 매장, 식당의 경계를 없애고 하나의 열린 공간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카말레온의 이름은 주변의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물 카멜레온과, 캠퍼가 만든 첫 신발인 카말레온에서 영감을 받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지역과 호흡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카테고리를 넘나드는 캠퍼의 정신을 계승하여, 관광객 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도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를 지향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카말레온의 디자인은 직관적이다. 호텔-매장-카페의 모든 기능을 18미터 길이의 바에 담아냈다. 호텔의 리셉션에 칠해진 카사 캠퍼의 고유한 색깔인 빨간색부터, 카페의 카운터에 칠해진 밝은 베이지색이 하나의 긴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만난다. 두 가지 색상이 만나는 가운데 부분은 호텔과 카페의 제품을 판매하는 매대의 역할을 한다. 색상을 통해 세 개의 서로 다른 기능이 경계 없이 하나의 공간에 어우러졌음을 표현하고 있다. 색의 스펙트럼이 가로지르는 수평적인 오브제는 거리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거리에 면한 큰 창들은 시원하게 열리는 형태로 만들었다. 안과 밖의 모호함이 만들어내는 개방적인 분위기는 소탈하면서도 격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작지만 힘이 느껴지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캠퍼는 각국의 전문가로 팀을 구축했다. 캠퍼가 탄생한 마요르카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GRAS Arquitectos를 중심으로 로컬 건축가 LauraVRave가 베를린 최신의 감도를 이끌어냈고, 전복적인 아이디어로 글로벌 회사가 된 MVRDV가 참여하면서 이미 업계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카페 카말레온 ⓒ Studio Yukiko
카페 카말레온 ⓒ Camper
카페 카말레온 ⓒ Studio Yukiko

공간을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캠퍼가 카말레온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바닥에 깔린 타일은 마요르카 지방의 장인과 협업하여, 천연 색소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카페의 벽과 테이블, 메뉴, 바깥의 간판과 소셜 미디어 계정을 수놓는 위트 있는 시각 요소들은 베를린 기반 디자인 팀 스튜디오 유키코(Studio Yukiko)가 맡았다. 스튜디오 유키코는 5개국에서 모인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회사로, 독특한 방식의 아트 디렉팅을 전개하고 있다. 공간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긴 바 형태의 조형에서 영감을 받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유기적인 모양의 디자인으로 카페와 거리를 채우고 있다.

카페 카말레온 ⓒ Daria Scagliola

카페 카말레온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체로 로컬 비즈니스의 영감이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공간이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실천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좋은 사례가 된다.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뿜어져 나오는 공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10년 뒤의 카사 캠퍼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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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문화가 되기까지

고유한 문화가 되기까지

눌라보 링크 ⓒ The Independent

브랜딩이 하나의 업태로 자리 잡으면서 브랜딩에 대한 정의와 브랜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논의도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브랜딩이라는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전제는 브랜드를 일련의 생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브랜딩 한다’고 가정하면, 언제부터 그것을 브랜드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브랜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부터 조직의 철학, 제품과 비즈니스가 표출되는 방식과 이면의 구조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무엇보다 소비자와 사용자 그리고 그들이 속한 사회 혹은 커뮤니티의 인식이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생활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일들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하여 지역에서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주에 소개하는 동네의 이야기는 ‘눌라보 링크(Nullarbor Links)’ 입니다. 

에어 하이웨이 ⓒLansdowne

서호주와 남호주를 잇는 에어 하이웨이(Eyre Highway)는 호주에서 가장 긴 직선 구간을 가진 고속도로입니다. 유럽의 탐험가 에드워드 존 에어(Edward John Eyre)의 이름을 따서 1941년에 건설되었습니다. 전체 길이는 1,600킬로미터에 이르고, 직선의 도로를 따라 똑같은 풍경이 수백킬로미터씩 이어지는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장 많은 사고가 발생하는 악명높은 도로 중 하나입니다.

데스 밸리(Death Valley)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위험한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해안가를 따라 호주 서부와 남부를 최단 거리로 잇는 주요한 고속도로라는 특성상 화물 운송 차량의 통행량이 많아 사고 건수가 줄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에어 하이웨이가 관통하는 지역은 끝없는 오지의 풍경이 펼쳐지는 천혜의 자연인 아웃백(Outback) 지역이어서 이렇다할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트럭 기사들이 쉬어갈 수 있는 커피 하우스와 작은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규모 리조트나 관광지를 조성하는 것도 일반적인 관광객의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져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2004년, 도로변의 호텔을 운영하는 밥 본지오르노 (Bob Bongiorno)와 에어 하이웨이 운영자 협회의 알프 카푸토(Alf Caputo)는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작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펼쳐진 평원에 골프 코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운전자들이 꼭 커피를 마시거나 하룻밤 묵지 않더라도 잠깐 차를 세워 놓고 몸을 풀면서 졸음을 쫓을 수 있는 소일거리를 제공하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결과적으로 파 72에 18홀 규격의 골프 코스가 완성되었습니다. 코스 사이의 거리가 워낙 멀어 전체 코스의 길이가 1,365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골프장이 된 것입니다.

눌라보 링크 ⓒ Carly Kruger
눌라보 링크 ⓒ Miles Ashton

눌라보 링크는 세련된 클럽하우스에서 출발해, 잘 다려진 골프웨어를 입고 잔디 위를 여유롭게 산보하며 즐기는 전통적인 골프 코스와는 정반대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모래가 섞인 거친 바람과 불규칙한 지형,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캥거루와 오소리를 상대하며 로드 트립과 함께 즐기는 골프 코스는, 항상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 있는 탐험가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눌라보 링크의 모든 코스를 통과하는 것을 일종의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로변의 모텔과 주유소들이 골프 코스의 거점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모이는 활발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각 코스의 이름은 고속도로를 따라 놓여진 지역들의 지명과 역사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지역 협회와 호주관광청의 협업으로, 스윙을 하며 밟고 있는 땅에 얽힌 과거를 읽어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관광 상품의 기획을 전개합니다. 기후와 지형의 특징 뿐만 아니라, 손수 지역을 일궈온 사람과 장소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눌라보 링크에 속한 몇 개의 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5번 홀 '딩고의 은신처' ⓒ The Weekly Times

Hole 5

1947년에 눌라보 지역으로 이사한 코랄와 비티 가족은 원래 있던 목재 건물에 딩고(Dingo) 올가미와 고철을 덧대 작은 모텔을 시작했습니다. 휘발유, 담배, 비스킷, 사탕, 맑은 음료와 물을 판매하는 모텔의 별명을 딴 5번 홀의 이름은 ‘딩고의 은신처(Dingo’s Den)’ 입니다. 티 이름은 처음 모텔을 시작한 가족의 이름을 딴 ‘코랄 & 비티’ 입니다. 딩고를 덧댄 수수한 모텔은 여전히 트럭 운전자들의 아늑한 쉼터로 남아있습니다.


Hole 7

유클라 모텔에는 지역 주민들이 맥주를 마시러 즐겨 찾는 바가 있습니다. 1971년 어느 날, 바를 찾는 주민들 사이에 캥거루와 함께 사막을 내달리는 벌거벗은 처녀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들에게 전화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지역의 미디어에 오르내리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제는 전세계에 눌라보의 요정으로 알려진 미지의 인물의 이름은 딴 7번 홀 ‘눌라보의 요정(Nullarbor Nymph)’ 입니다. 


Hole 12

당시 서호주 최고의 아마추어 골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팻 프렌디빌(Pat Prendiville)은 돌연 1965년에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에어 하이웨이 근처의 작은 마을 발라도니아(Balladonia)의 현대화 사업에 참여합니다. 이후 45년간 모텔을 경영하며 지역을 개척해왔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티를 가진 12번 홀의 이름은 ‘스카이랩(Skylab)’ 인데, 팻이 모텔을 운영하며 겪은 에피소드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스카이랩은 미국 항공 우주국(NASA)가 1979년에 발사한 미국 최초의 우주 정거장으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임무를 완수한 스카이랩이 지구로 떨어지는 위치가 정확히 팻이 운영하던 발라도니아 모텔이라는 점을 다급하게 알렸습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지역을 순찰하던 어업 순찰관이 떨어진 잔해를 발견하고 NASA에 쓰레기 벌금 티켓을 발행했고, 결국 벌금은 면제되어 평화로운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눌라보 링크 ⓒ Ceduna Weekly Times

동네를 오가며 일하는 트럭 운전수들의 안전과 주민들이 고속도로 변에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을 살리기 위해 시작된 아이디어에서, 전세계의 사람들이 찾는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성패를 논하기 전에 계속해서 곱씹어 볼만한 것입니다. 자칫 구태의연할 수도 있는 동네의 과거를 발신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백과사전이나 박물관에서 볼 법한 정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역 내부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끄집어낸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붙여진 이름의 오래된 감성에서 느껴지는 진심도, 눌라보 링크의 비주류의 날 것에서 오는 매력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눌라보의 시작처럼, 건조한 일상에 가장 가까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튀어 나올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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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하는 취향에 참여하는 일

확장하는 취향에 참여하는 일

A PIT ⓒ A Pit Autobacs Shinonome

취향에 깊이가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면,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의 감화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통찰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취향이 확고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구축된 자기만의 관점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취향을 확장하고, 새로운 취향까지 포용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만나본 기업의 크리에이티브, 감도 높은 브랜드, 좋아하는 동네에서도 이런 지점들을 느꼈습니다. 취향에 대한 확고한 관점을 가지고 유연하게 성장하는 비즈니스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이번주에 소개하는 동네의 장소는 ‘A PIT’ 입니다. 

A PIT ⓒPARTY

자동차 부품과 액세서리 소매업을 기반으로, 자동차의 소사이어티를 꿈꾸는 주식회사 오토벅스 세븐(AUTOBACS SEVEN)은 시노노메에 위치한 플래그십 스토어를 리뉴얼해 ‘A PIT AUTOBACS SHINONOME’ 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공간을 선보였습니다. 「자동차도 인간도 피트인」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자동차에 관한 모든 것을 원스톱으로 만나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자동차를 기반으로 다양한 생활방식을 제안하는 서점과 카페 등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승하는 가족과 친구 등 폭넓은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눈여겨 봐야하는 지점은 A PIT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ABT 마케팅 주식회사’ 입니다. CCC(Culture Convenience Club)와 함께 설립한 합작 회사로, CCC가 보유한 6,800만명의 사용자 데이터와 오토벅스가 보유한 1,500만명의 자동차 고객 데이터를 포함한 양질의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구축 및 마케팅 서비스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두 회사가 각각 책과 자동차라는 특정한 제품군을 판매하면서 축적한 데이터는 카드사나 플랫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정성적인 영역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합작 회사 설립의 의미가 있습니다. CCC의 경우 전국의 츠타야 지점들과 제휴된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결제 및 적립, 예약에 활용되는 T-POINT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DVD를 시작으로 가전제품까지 판매하고, 서점과 공유오피스 뿐만 아니라 각지의 공공시설까지 운영하고 있는 CCC의 고객 데이터는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1970년대에 시작해 전국에 598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오토벅스의 뾰족한 통찰력이 더해졌습니다. 

A PIT ⓒPARTY
A PIT ⓒPARTY

A PIT는 총 3개 층으로 구성됩니다. 지상 1층은 메인터넌스 피트입니다. 연간 3,000대 이상 차검 실적을 가진 오토벅스의 노하우가 집약된, 동네에서 가장 좋은 카센터를 지향합니다. 기본적인 점검부터 타이어와 배터리 교체, 세차, 코팅, 오일 관리, 수입차 정비까지 가능합니다. 자동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을 위한 ‘PREMIUM PIT’ 서비스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차를 맡기면 전용 스마트폰을 건네주는데 ‘PIT LIVE VIEW’를 통해 자신의 차량이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됩니다. 일종의 단골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는데, 자신의 차량만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정비사를 지명해 배정받을 수 있고, 피트 공간을 예약해서 비치된 설비와 공구로 직접 정비를 실시할 수도 있습니다. 차량이 정비되는 동안에는 독립적인 라운지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관람하거나, 위층의 츠타야와 스타벅스, 자동차 용품점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A PIT ⓒSDA
A PIT ⓒSDA
A PIT ⓒSDA

2층에는 츠타야와 스타벅스가 들어섰습니다. 특히 시노노메의 츠타야는 ‘가족과 자동차’, ‘자연과 자동차’, ‘여행과 자동차’ 등 자동차를 주제로 라이프스타일을 재정의한 8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고, 자동차 모형과 장난감, 차량에 부착할 수 있는 캠핑용품 등 각 테마별로 관련된 잡화를 판매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기준으로 분류된 서가들 사이를 유영하며 스스로의 생활 방식에서 자동차가 차지하는 지위를 곱씹어 보는 것 자체로도 유의미한 경험입니다. 한켠에는 부모가 자동차를 정비하는 동안에 아이들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놀이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공간은 놀이 기구와 놀이 환경을 연구하고 세계 각지의 브랜드가 생산하는 다양한 놀이 용품을 판매하는 ‘보네룬드’에서 운영합니다. 2층 야외 공간에는 간단한 퍼팅과 스윙 연습이 가능한 골프 연습장도 있습니다. 육아, 골프, 등산과 같이 자동차를 좋아하는 고객들의 다른 관심사와 취향까지 배려하는 기획이 인상적입니다.

 

 

 

A PIT ⓒATPRESS
A PIT ⓒATPRESS

3층은 오직 자동차 애호가를 위한 특별한 공간입니다. 한켠의 독립된 공간에서는 드라이브 시뮬레이터를 통해 250개의 차종을 200개의 코스에서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중앙에는 자동차용 시트, 손잡이, 헬멧, 차내 음향 기기, 튜닝용 악세서리를 판매합니다. 시트 메이커 RECARO의 목업 좌석도 마련되어 있어 직접 시트의 감각을 느껴보고, 운전자 입장에서 내비게이션의 디스플레이나 오디오의 음향을 세심하게 체감해볼 수 있습니다.  

 

 

A PIT ⓒPARTY

‘나도 자동차나 좋아할걸’ 이라는 질투심이 고개를 들 정도의 짜임새와 서비스가, 고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취향과 관점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A PIT의 핵심입니다. 진정으로 존중받는 감각이 브랜드의 매력으로 치환되는 경험은, 구축한 공간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집착과 열정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자율주행기술이 상용화되면 자동차는 집과 사무실의 연장선에 놓인 공간이 됩니다. A PIT에서의 경험이 차 안으로 압축되어 구현되는 일이 근미래의 경험이 될 것입니다. 차를 소유하는 감각은 가지고 있지만 직접 운행하거나 관리하지 않고도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꼬리를 무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A PIT 는 서두에 말한 취향이 확고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명확한 관점으로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동네의 공간이 지향해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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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발상이 실현되면

강력한 발상이 실현되면

프리웨이 파크 ⓒ Wikimedia Commons

예술 뿐만 아니라 건축에 있어서도 전복적인 이념, 양식 내지는 급진적인 실험들이 변화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생각이나 스케치에 그치곤 합니다. 현실적으로 소비자, 그러니까 건축에서는 개인, 개발업자, 기업 등에게 소구되기 어려운 구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공공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사업의 경우에는 이따금 아주 도전적인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이나 구조물은 너무나도 특수해서, 확장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생각들이 구현된 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찰과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이번 주에 소개할 동네의 장소는 시애틀의 ‘프리웨이 파크(Freeway Park)’ 입니다.  

미국의 주간고속도로 ⓒ Dwell

1950년대 말부터 1969년에 걸쳐 완공된 5번 주간고속도로는 워싱턴의 중심지 다운타운과 주거지 피르스트 힐을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양쪽 지역을 걸어서 오가기 위해서는 10차선에 달하는 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도로를 따라 걷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시애틀 메트로를 설립하고, 워싱턴 호수 수질 개선사업을 주도했던 시민운동가 짐 앨리스는 고속도로 위를 덮는 공원을 제안했습니다. 토양을 지지하는 거대한 구조물과 매연을 처리하는 설비 등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사업이었지만, 결국 1976년에 문을 열게 됩니다. 세계 최초로 고속도로 위에 건설된 공원인 프리웨이 파크는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공공 장소를 설계한 조경가 로렌스 할프린(Lawrence Halprin)이 맡았습니다. 

프리웨이 파크 ⓒ The Cultural Landscape Foundation
프리웨이 파크 ⓒAaron Leitz Photography

그는 6천평이 넘는 거대한 면적을 작은 단위의 사각형으로 나누어, 공원을 누비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대한 구조물이 아니라 친근한 동네의 공원처럼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동시에 사각형의 단위들의 높낮이가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잠깐 걸터 앉을 수 있는 벤치가 되기도 하고, 아래로 푹 꺼져서 작은 폭포가 생기기도,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기도 합니다. 변화하는 기둥들을 따라가면서 예상치 못한 분위기의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 구성이, 하나의 미로와 같은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러면서도 중심이 되는 큰 광장을 두어, 다양한 커뮤니티를 위한 이벤트가 열릴 수 있는 여지를 두었습니다.

 

프리웨이 파크 ⓒ Paul Dorpat
프리웨이 파크 ⓒ Freeway Park Association

프리웨이 파크 서측으로는 다운타운 답게, 하얏트·힐튼과 같이 관광객을 위한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컨벤션 센터와 시애틀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어 초창기의 프리웨이 파크는 더욱 활기를 띄었습니다. 동측으로는 오래된 주거지와 미술관, 병원 등 시애틀의 진정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피르스트 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숨어있을 구석이 많은 공간적인 특징 덕분에, 한때는 노숙자와 마약의 온상이 되어 골머리를 앓았지만, 지속적으로 자금을 모아 시설을 정비하고 이벤트를 열어, 밝은 공원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리웨이 파크 ⓒ Riisa Conklin

프리웨이 파크는 급진적인 아이디어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원을 배경으로 오랜 시간 축적된 이미지들만으로도 시민 정신이 깃든 장소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애틀이라는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공간입니다. 기존의 것을 뛰어 넘는 강력한 발상을 실현시키는 일은, 반복되어 온 관성을 깨고 실천적인 과제들을 산더미처럼 안겨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땅에 구속되어 있는 물리적인 환경이라는 점에서 공간에서의 실험은 직접 해보지 않으면, 특히 공간이 밟고 있는 동네와 지역에 어떻게, 얼마나 유효한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네에 없던 경험을 제공하는 비즈니스와 장소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이,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지역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 출발점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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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시작과 끝

동네의 시작과 끝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농경사회에서는 성별에 따라 동네의 범위를 다르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나 말이 쉽게 오갈 수 없는 산이나 강처럼, 물리적인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을의 경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일상의 반경이 넓었던 남자는 주거지 바깥의 농경지와 산의 어귀까지를 마을로 인지했습니다. 지금은 성별이 아니라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동네라고 인식하는 공간의 범위가 달라질 겁니다. 결국 동네의 경계에 대한 인식은 거주자들의 생활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동네의 경계에 위치한 동네의 입구는 지역의 얼굴이자, 문화를 반영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해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나무, 마을의 안녕을 비는 장승이나 솟대, 이웃들이 오며가며 안부를 묻는 정자가 만들어내는 공간이 마을의 입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말을 대신할 이동수단, 특히 대중교통이 동네 구석구석까지 연결되면서 역(Station)이 동네의 현관이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어떤 장소를 가기로 하면, 자연스럽게 그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서 만날 약속을 정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개성이 강한 동네의 역은 지역의 문화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개찰구를 힐끗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홍대입구역, 옛 터전의 모습을 간직한 광장이 펼쳐지는 동대문역사공원역, 오며가며 간단한 생필품이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매장으로 가득한 강남역까지. 때로는 지하철 출구 앞의 카페나 광장이 그런 역할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에는 동네의 첫인상을 만드는 역이라는 공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소 엔크로스를 소개합니다.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JR노선이 지나가는 노베오카 역 주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엔크로스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탄생했습니다. 역과 동네의 새로운 관계를 구상하기 위해, 실제로 이 장소를 매일 이용하게 될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워크숍을 1년간 진행했습니다. 커뮤니티 디자이너 Studio-L에서 맡은 워크숍을 통해 이 장소가 담아야 할 용도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된 것입니다. 시민들이 직접 구상 단계에서 참여하는 것의 의미는 어떤 명분을 넘어 함께 동네를 만든다는 공동의 감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결론은 ‘새롭고 자유로운 마을’이라는 기치아래, 시민들이 언제든지 방문해서 크고 작은 활동을 할 수 있고, 그런 활동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발신할 수 있으면서도, 오랜 시간동안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획의 방향성은 직관적인 격자 형태의 건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넓은 스펙트럼의 커뮤니티부터, 계속해서 변화할 미래의 지역의 상까지 담을 수 있는 단순한 격자 구조를 기반으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동네의 거리로 확장될 수 있도록 투명하고 열린 공간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교류가 자유롭게 일어나는 장,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교차하는 장소라는 뜻의 ‘엔크로스(Encross)’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엔크로스 ⓒ Tecture Magazine

엔크로스의 운영은 CCC가 맡았습니다. 다이칸야마 T사이트를 기점으로, 책을 위시한 문화를 매개로 다양한 지역에 있는 공공시설과 도서관, 상업시설을 도맡아 운영하고 있는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ulture Convenience Club)의 감도와 노하우가 엔크로스에서도 발현되고 있습니다. CCC는 여전히, 소위 민-관 협력 체제의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어인 것 같습니다.

CCC는 엔크로스를 관통하는 ‘새롭고 자유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운영의 가이드라인을 세웠습니다.

• 365일 연중 무휴,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언제든지 열려 있는 공공 시설

• 동네에서 가장 큰 서점과 카페가 있는 곳

• 이용하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아늑한 거처가 있는 곳

• 다양한 이벤트가 날마다 행해지고 있는,
  언제라도 뭔가 하고 있는 곳

• 시민 활동을 열린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시민이 발표하는 장소

• 아이와 여성에게 친화적인 시설

• 동네의 정보 발신 스테이션이 되는 곳

• 지역의 좋은 것을 꾸준히 엄선해 전달하는 곳

•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역의 대합실

엔크로스 ⓒ Culture Convenience Club

이상의 9가지로 엔크로스가 지역에서 해야 할 역할을 설정하고, CCC의 오리지널인 츠타야와 스타벅스를 중심으로 벽이 없이 완전히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점의 책장 사이사이에는 열차 시간표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디스플레이가 있어 짬을 내서 슥슥 책을 읽을 수도, 산책하다가 들러 어린이 전용 공간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로컬 브랜드들의 워크샵이 열리기도 하는 장소입니다. 어쩌면 지역 발전을 위한 정책 토론회나, 비상시에는 진료소가 될 수도, 지역 축제의 무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엔크로스 ⓒ Inui Architects

어쩌면 피상적일 수도 있지만 엔크로스에 얽힌 이야기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리고 실제로 그동안 엔크로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활동들 안에서 진정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느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동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엔크로스는 그야말로 동네의 얼굴이자 일상적인 생활 공간이며, 어쩌면 동네의 자부심과 가능성의 꿈을 심어주는 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간이 반드시 공공 시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동네의 카페나 소매점이 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유의미한 지점은 더 나은 동네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장소를, 로컬 브랜드와 지자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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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발을 맞추는 유연함

변화에 발을 맞추는 유연함

뉴욕의 피어들 ⓒ City Park Alliance

물리적인 공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도시에서는 기능을 상실한 시설이나 장소가 많은데, 어떻게 하면 지역의 유휴공간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살고 있는 동네 주변을 둘러보면, 버려진 철로를 공원으로, 석유를 저장하던 탱크를 전시장으로, 고가 도로의 하부를 체육시설로 탈바꿈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시하는 이런 아이디어들이 잘 구현되어 지역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동네의 맥락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기획이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뉴욕시의 피어 파크(Pier Park)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허드슨 강을 따라 선박이 정박하던 수십개의 피어(Pier;교각)들을 지역에 없던 다양한 생활공간으로 재탄생시켜, 그 지역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 뉴욕의 피어들 ⓒ Ocean Liners Magazine

피어 파크의 비전과 목표

1. (법에 서술된) 거대한 수변 공원의 전체적인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공원을 끊임없이 디자인하고 구축해야 한다.

2. 커뮤니티의 자산이자 지역 경제의 동력, 그리고 수많은 뉴욕 시민들과 여행객들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높은 수준으로 공원을 유지하고 운영해야 한다.

3. 공공 교육, 연구 및 생물의 서식지인 수변의 생태 자산을 보호해야 한다.

4.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공원에서 발생하는) 여가, 교육, 문화의 기회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

5. 지속적으로 상업적인 접점을 개발하여, 경제적으로 자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피어 파크의 비전 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피어 파크를 만들어가는 조직입니다. 1998년도에 뉴욕시 법 제정을 통해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Hudson River Park Trust)´라는 운영 조직이 탄생했습니다. 비전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직의 가장 큰 전제 조건은 재정적으로 자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민의 세금 없이 스스로 지역의 공간을 운영하면서 공공의 이익을 획득한다는 강력한 전략이 피어 파크의 모든 기획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구글의 오피스, 뮤지션의 공연과 나이키의 팝업 스토어가 열리는 베뉴, 강이 보이는 카페,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진 거대한 복합 공원이 탄생했습니다. 민간의 입장에서는 공원에 유입되는 다양한 고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공공의 입장에서는 수준 높은 공원의 프로그램과 시설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와 함께 피어 파크를 만들고 있는 또 하나의 조직이 ‘브루클린 브릿지 파크 코퍼레이션(Brooklyn Bridge Park Cooperation, BBPC)’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브루클린 브릿지와 맨하탄 브릿지가 완공되면서 페리를 통한 이동은 사라졌고 1984년 선박 운항까지 중단되면서 피어는 원래의 기능을 잃고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항만국은 피어들을 민간에 상업적인 용도로 개발할 수 있도록 팔기 시작했고.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가 같은 해에 BBPC의 전신인 지역 개발 회사가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피어와 주변 지역의 개발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초에 이르러서 공공 자금이 투입되어 전체적인 개발 방향이 그려졌고, 2010년에 첫번째 피어 1번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피어 6번까지 차례로 조성되면서, 지금의 BBPC는 개발보다는 공공성에 초점을 맞춘 기획과 운영을 통해 피어 파크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두 조직의 성격과 역사는 다르지만 지역 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높은 질의 공공 장소를 만들겠다는 비전은 같습니다. 피어 파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피어 몇 군데를 소개합니다.

Pier 40 ⓒ Hudson River Park

Pier 40

 

피어 파크에서 가장 큰 피어입니다.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의 본사가 있는 상징적인 피어이기도 합니다. 가운데에는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열려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광활한 볼파크가 있습니다. 볼파크를 둘러싼 건물은 공영주차장과 크루즈 선착장, 뉴욕 유일의 공중그네 연습장, 그리고 허드슨 강의 다양한 생물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네이티브 아쿠아리움 웻랩(Wetlab)이 위치하고 있는 복합 공간입니다. 퇴근 후 공을 차는 즐거움, 크루즈에 몸을 싣는 설레임, 아쿠아리움에 견학온 아이들의 호기심이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이보다 더 풍성한 도시가 있을까요? 

 

Little Island ⓒ Timothy Shenck

Pier 54 (Little Island)

 

부두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 1970-80년대 54번 피어는 당시 성장하던 뉴욕 LGBTQ 커뮤니티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86년부터 25년간 인권 축제의 일환으로 기획된 ‘댄스 온더 피어(Dance on the Pier)’의 무대 역할을, 그 이후에도 여름의 축제와 공연이 열리는 뉴욕 문화 베뉴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2012년 뉴욕을 강타한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54번 피어를 비롯해 많은 피어들이 훼손된 이후, 허드슨 리버 파크 트러스트의 파트너 중 하나였던 딜러 본 퍼스텐버그 재단 (Diller von Furstenberg Family Foundation)은 허리케인으로 파괴된 54번 피어를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공공 공간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디자인을 맡은 영국의 토마스 헤더윅은 다른 피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태풍에 날아가고 남은 피어의 기둥들에서 영감을 받아, 피어 자체를 하나의 완결성 있는 예술 작품으로 바라봤습니다. 마치 허드슨 강에 떠있는 거대한 설치미술이나 조각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낯선 형태의 기둥들이 모여 새로운 땅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소수자와 인권을 상징하던 피어 54의 정신을 이어가는 듯합니다. 평평한 뉴욕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인공의 언덕을 만들어 다양한 높이에서 강과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산책길과, 강을 배경으로 공연을 바라볼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을 만들어 일상적인 활동부터 비일상적인 행위까지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냈습니다. 

 
 

 

Pier 57 ⓒ Hudson River Park

Pier 57

 

1952년에 만들어진 57번 피어는 미국 국립사적지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건축 당시 혁신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교각입니다. 다른 피어와 달리 물 속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어진 기초가 지지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때문에 보다 더 많은 하중을 견딜 수 있어서인지 한동안은 뉴욕의 버스 주차장으로 쓰였습니다. 현재는 기존 건물의 리모델링이 진행중인데, 공사가 끝나면 시티 와이너리(City Winery)와 구글이 둥지를 틀 예정입니다. 뉴욕 중심부를 떠나 허드슨 강의 중심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시티 와이너리의 창립자 Micheal Dorf의 ‘판데믹 시대에도 일상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겠다’는 선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연장과 콘서트 홀, 와인 바와 카페, 업무 공간과 옥상 정원이 어우러진 활기찬 장소가 될 것 같습니다.

 

 

Chelsea Pier Fitness ⓒ Chelsea Piers

Pier 59~61 (Chelsea Piers)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을 배웅하고 맞이했던 첼시 피어는 여느 피어들과 마찬가지로 쇠락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허드슨 파크와 브루클린 브릿지 파크의 논의가 시작될 무렵 첼시 피어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었습니다. 이무렵 설립된 ‘첼시 피어 매니지먼트(Chelsea Pier Management. Inc)’는 교통부와 피어에 대한 임대 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첼시 피어 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복합시설은 1995년부터 단계적으로 조성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실내 수영장과 암벽등반장, 체조연습장, 아이스링크,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골프 연습장과 피트니스가 갖춰진 복합 체육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거기에 더해, 보육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어린이 운동 프로그램과 리그를 연계해서 운영하고, 웨딩홀과 대회의장 등 도시의 일상에 꼭 필요한 지원 시설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뉴욕 중심부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큰 공간을 활용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갖춘 첼시 피어는 20년 넘게 많은 뉴요커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로 자리잡았습니다. 

 

 

Pier 17 ⓒ Pier 17

Pier 17

먹거리가 가득한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지역과 해양 박물관에 접하고 있는 피어 17의 잠재력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꼭 거쳐가는 시포트 거리의 활발한 분위기를 더 극대화할 수 있는 이벤트 베뉴로 기획되었습니다. 다리와 도시의 야경을 조망할 수 있는 옥상 공간을 활용한 공연장은 이미 빌리 아일리시 등 트렌드의 첨단에 서있는 여러 뮤지션들이 거쳐갔습니다. 유럽과는 달리 광장보다는 거리를 중심으로 계획된 도시이다 보니 뉴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야외의 탁 트인 공연장이 주는 공간감이 매력적입니다. 옥상을 받치는 하부의 공간에는 박은주 쉐프님이 운영하는 쌈바(Ssäm Bar)를 비롯해, 시포트 지역의 맥락에서 이어지는 다양한 식당들이 자리잡았습니다. 허드슨 강을 바라보는 식당들의 널찍한 테라스와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는 광장도 피어 17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Pier 6 ⓒ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Sandbox Village at Pier 6 ⓒ Julienne Schaer
Slide Mountain at Pier 6 ⓒ Land Perspectives

Pier 6

 

브루클린 브릿지 파크에 속해 있는 6번 피어는 특히 아이들과 함께 하기 좋은 놀거리로 가득합니다. 바위 언덕을 따라 내려오는 신기한 미끄럼틀, 작은 계곡에서의 물놀이, 독특한 형태의 그네로 가득한 길, 푹신한 모래 사장에 있는 통나무 집 등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터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거기다 강을 바라보는 테라스를 갖춘 식당도 있고, 가져온 도시락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피크닉 공간, 도심 속에서 비치 발리볼을 즐길 수 있는 전용 경기장, 반려견이 목줄 없이 뛰어 놀 수 있는 도그런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공원에 나무와 벤치만 있는 게 아니라,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다양한 여가 생활을 지원하는 지역의 인프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피어입니다. 

 

Pier 2 ⓒ Scott Shigley
Pier 62 ⓒ Hudson River Park

30년, 40년 뒤에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유연함이 피어 파크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연함은 시민들로 하여금 피어 파크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오래오래 활기찬 지역의 장소로 남아있을 것만 같은 신뢰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단단한 기획과 유연함을 바탕으로 공공과 민간, 자연과 도시가 만나는 흥미로운 실험의 장, 피어 파크가 주는 영감이 한국의 로컬 환경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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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기억과 정취로부터

각자의 기억과 정취로부터

슈페르킬렌 공원 ⓒ Iwan Baan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태어난 사람은 많지 않다. 도시에서는 더 그렇다. 각자의 이유로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지역에 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장소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같은 나라에서도 사는 동네가 바뀌면 한동안은 낯선 기분을 느끼기 마련인데, 하물며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된다면 어떨까. 여행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고향에 대한 감정은 더욱 깊이 남게 된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동네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1993년 뇌레브로 폭동 ⓒ Wikimedia

90년대 코펜하겐은 난민 수용과 유럽 연합 가입 등의 이유로 벌어지는 시위와 폭동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뇌레브로는 그 중에 가장 큰 폭동이 벌어졌던 동네다. 오래전부터 낙후된 지역이었는데, 이민자와 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마약과 범죄의 온상이었던 이 지역은 지금까지도 ‘코펜하겐의 게토’라고 불린다.

당시 뇌레브로에는 오래 전 철도 노선이 해체된 채 방치된 땅이 있었다. 동네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750미터 길이의 버려진 공간이었는데, 양쪽으로는 꽤나 활기찬 상점가들이 있었다. 코펜하겐 시는 이 공간을 동네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열쇠라고 보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모았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쐐기라는 의미로 ‘슈페르킬렌’ 으로 정해졌다. 덴마크어로 ‘거대한 쐐기’라는 뜻이다. 

리서치와 기획은 코펜하겐의 아티스트 그룹 Superflex, 건축은 비아케 잉겔스가 이끄는 BIG, 조경은 독일의 Topotek-1이 맡았다. 팀의 조합도 상당히 흥미롭다. Superflex는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전위적이고 선언적인 작업들을 세계 각국에 선보여왔다. BIG는 실험적이고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건축가들 사이에 이름을 올린 덴마크의 젊은 건축가다. Topotek 1은 베를린을 기반으로 수준 높은 공공 공간들을 만들어온 조경 회사다. 셋의 조합만큼이나 이들을 선택한 코펜하겐 시의회의 기획적인 마인드도 인상적이다. 

 

주민들의 고향에서 모은 것들 ⓒ Public Space

이들이 발견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임과 동시에 가장 잠재력 있는 지역만의 고유한 특징은 ‘문화적 다양성’이었다. 60여 개국에서 모인 주민들 자체가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 1년이 넘게 주민들과 대화하며 무엇이 그들의 일상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했다. ‘극단적인 참여(Extreame Participation)’라고 이름 붙인 이 과정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인 뿌리와 고국의 정취를 담은 다양한 오브제와 디자인을 모두 모은다는 의미의 ‘세계 박람회’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팔레스타인에서 직접 가져온 붉은 흙 ⓒTorben Eskerod

주민들과 대화하고, 직접 그들의 고국을 함께 여행하기도 하면서 공간을 채울 요소들을 구상했다. 각기 다른 국가에서 모인 오브제와 가구, 간판과 조명, 동상과 미끄럼틀까지 모였다. 자칫 무질서하게 어질러진 장소처럼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배치하기 위한 기준을 세우는 것도 지역에서부터 출발했다. 

좁고 긴 형태의 땅을 크게 세 가지 성격의 공간으로 나누었다. 지역 체육센터와 도서관에 가깝고 스포츠 공원과 이어지는 남쪽은 야외 운동와 문화 활동을 위한 장소로, 기숙사와 카페, 식당이 많은 북쪽은 녹지가 많아 산책하고 쉬어가기 좋은 공원으로 정했다. 남쪽과 북쪽 사이의 공간은 도로에 면하고 있어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광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붉은 광장에는 운동하기에 적합한 충격 흡수용 바닥재와 고무 합성 수지를, 도로에서 이어지는 검은 광장에는 지역 행사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아스팔트를, 녹색 공원에는 산책하기 좋은 마감재와 잔디를 깔았다.

방콕에서 온 복싱 링 ⓒTorben Eskerod
모로코에서 온 분수대 ⓒTorben Eskerod
각자의 고향에서 온 간판들 ⓒTorben Eskerod

자메이카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 방콕의 복싱 링, 노르웨이의 단풍나무, 쿠바의 벤치, 일본의 미끄럼틀, 브라질의 공중전화 부스, 루마니아의 체스 테이블, 모로코의 분수대, 카타르의 치과의사 간판, 스페인의 탁구대, 카불의 그네까지. 

모든 것은 사람 한명 한명의 기억과 자라온 동네의 정취에서 출발했지만, 이것들이 모여 지역의 이야깃거리이자 공동의 생활 공간이 되는 과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축하하는 사람들 ⓒ Hasse Ferrold

슈페르킬렌 파크에서 재미있는 점은 위성 사진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광장 안에서 보는 모습 사이에 있는 큰 괴리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뇌레브로는 여전히 분쟁과 소요가 끊이질 않는 부정적인 동네지만,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뒤섞인 채 살아온 사람들은 지역에 대한 그들만의 애정과 자부심이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외지인으로 이루어진 이 동네에서 덴마크라는 국가의 유럽 연합 가입을 반대하는 큰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반증일 수도 있다. 지역의 본질을 꿰뚫는 듯한 이 과감한 실험은 그 자체로 동네의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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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는 여기서 시작됐다

아오야마는 여기서 시작됐다

어릴적부터 한 지역에 오랜 기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네가 변해온 과정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할 것이다. 재미있는 건 동네가 변하는 속도다. 조금만 주변을 관찰하면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는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핵심은 사람이다. 거리에 사람이 많아지면 지역은 바뀌기 시작한다. 지하철역이 생기거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거나, 대형 마트나 쇼핑몰이 들어서면 그러한 변화가 생긴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건물, 로컬 브랜드나 축제와 같은 무형의 프로젝트로 인해 지역에 새로운 색깔이 생기기도 한다.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힐즈, 프라다와 오프화이트, 몽클레어까지. 도쿄 패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아오야마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브랜드의 공간들이다. 하지만 도쿄를 여행해 본 사람 중에서 ‘패션의 아오야마’ 라고 불렸던 이 거리를 수놓는 면면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0년대의 아오야마는 낡은 건물들 틈에서 젊은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들이 태동하던 수수한 동네였다. 개발을 주도한 탄광회사 태평양흥발은 프로그램 기획은 하마노물상연구소, 설계와 디자인은 야마시타 카즈마사에 맡겨 팀을 꾸렸다. 프로그램 기획이라는 건 토지를 개발할 때 최적의 쓰임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일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생소한 분야다. 그들은 작은 교차로의 모서리에 있던 이 땅을 아오야마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할 시작점이라는 의미로 ‘프롬 퍼스트(FROM-1st)’라고 이름 붙였다.  

FROM-1st Building / Wikipedia

아오야마처럼 유행을 따르는 지역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 디자이너, 변호사, 의사, 작가, 건축가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프리랜서들을 위한 거주 공간과 감도 높은 상점들을 수용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생활과 일, 쇼핑이 모두 조화롭게 가능한 미니타운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층에는 상점이 들어서 있고 상부에는 스튜디오 형태의 공동주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거리에 면한 창의 크기는 줄인 대신에 사선 형태의 천창을 계획한 것이 특징이다.

Office Drawing ⓒKazumasa Yamasita

프롬 퍼스트의 거주-업무 공간도 흥미롭다. 설계를 담당한 카즈마사 야마시타의 드로잉을 보면 전체 기획 의도에 맞게 거주와 업무의 기능을 모두 충족하는 입체적인 형태로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이 강한 디자이너를 위한 공간 답게, 개별 작업 공간을 단차와 수납장으로 분리했다. 작업 공간은 거리에서 들여다보이지 않지만 천창을 통해 충분한 햇살을 받을 수 있다. 2층 구석 구석에는 소파나 원형 벤치, 스툴과 다이닝 테이블을 두어 서로 언제든지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깥으로 나가면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화단과 테라스가 펼쳐진다.

FROM-1st Building ⓒGreen Seed
FROM-1st Building ⓒFreedom Corporation

프롬 퍼스트를 시작으로 아오야마는 이세이 미야케, 비기, 요지 야마모토, 꼼 데 가르송을 중심으로 한 DC 브랜드들의 성지가 되었다. 전성기는 지났지만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아오야마 거리에서의 존재감은 여전한 듯 하다. 그 힘은 시대를 초월하는 디테일에 있다. 안쪽에 숨겨진 중정에 떨어지는 햇살, 구석구석 보석 같은 공간을 찾아다니는 경험과 보행자의 눈높이에 맞춘 적정한 비례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정에 들어서면 꽃에 물을 주는 가게 직원과,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 잠깐 바람 쐬러 집에서 나오며 기지개를 켜는 사람이 함께 하는 생경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Figaro at FROM-1st ⓒFigaro
A-POC ABLE ISSEY MIYAKE at FROM-1st ⓒISSEY MIYAKE

아오야마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이세이 미야케를 비롯해 이마바리 타월, 프랑스 풍의 카페 피가로, 안경 가게, 도자기 상점, 꽃집, 침구 매장과 헤어샵, 수집 용품점 등 일상과 가까운 카테고리의 감도 높은 브랜드로 가득 채워져 있다. 지역을 바꿔놓은 과거의 영화는 차치하더라도 프롬 퍼스트라는 이름 이상의 의미로 동네 깊숙이 뿌리내렸다.

도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새로운 공간과 콘텐츠를 발견하고 지역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려는 유의미한 시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동안 동네에서 경험하지 못한 생활 양식과 풍경을 만들어 가고 있는 로컬 비즈니스라면 깊게 들여다 볼 만한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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